5. 너무 이른 사랑과 염막집 염분이 ①재회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한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
씨름판의 왁자지껄한 소음을 등지고 남천내 강둑을 따라 기출이가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이제 나이 열다섯. 회창회창 여린 몸매에 어깨가 구부정하지만 키만은 어느 장골 못지않다.
“쪼옴. 쫌. 기출아, 거서 쪼깨만 기다리면 안 되겠나? 지발하고 쫌 천천히 가자.”
한참 뒤 쳐져 따라오던 끝님이가 통사정했다. 벌써 열아홉, 두 뺨에 어린 홍조와 물기 흐르는 눈빛에 여인의 향기가 가득했다. 종종걸음 치는 치맛자락과 나풀거리는 옷고름과 댕기, 어깨에서 등을 타고 흐르는 찰랑대는 선이 수양버들처럼 나풀대며 멋이 흘렀다. 세상 여느 사내치고 혹하지 않을 자 없으련만 기출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백사장 세 모래밭에 칠성단을 묻고
우리 어머니 만수무강을 비나이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한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
이미 추석을 지난 가을의 강은 강바닥의 봇둑 밑의 널따란 검은 반석이 훤하게 드러나고 군데군데 모래자갈위엔 약국대(여뀌), 고마이대가 붉고 흰 쌀알처럼 생긴 작은 꽃송이들을 가득 피워 거대한 식혜그릇을 연상시키고 있었고 여울에 부서지는 잔물결이 가끔씩 거울처럼 반사되어 기출이와 끝님이의 눈을 부시게 했다.
“문디 머시마, 벌써부터 지도 사내라고 저래 쪼를 빼고 지랄이네. 지 좋아하는 가시나의 말을 한번쯤 들어주면 안 되능가? 꼭 그래야 되능가?”
마구뜰 봇머리에서 낮은 목소리로 계속 흥얼거리던 기출이가 문득 멈추어서 한참이나 끝님이를 기다렸다. 쌕쌕 가쁜 숨소리로 다가오는 끝님이에게
“누가 보문 우짤끼고? 소문나문 우짤끼고? 누부야는 좀 천천히 오소. 저 산모롱이 땅꾼집 지나 행상집 돌아서 내 기다달릴 테니 천천히 오소.”
“땅꾼이 나오면 우짜노? 배미가 나오면 우짜노?”
“내가 멀찍이서 보고 있지요.”
“나는 행상집이 무섭다. 온갖 구신이 다 나오면 우짤끼고?”
“그라문 내가 행상집 앞에서 기다리지요.”
만나보세, 만나보세, 만나보세
아우라지 선창가에 만나보세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기출이 다시 휘적휘적 걸어 나가자 손수건을 꺼내 땀을 한번 훔친 끝님이가 다시 힘을 내어 뒤따라갔다. 아직 벼를 베지 않은 논배미에 메뚜기들이 어지럽게 날아올랐다. 어떤 놈들은 암수가 짝을 지어 나락이파리에 숨죽이고 붙어있기도 했다. 수놈을 업은 통통한 암놈이나 제 아낙에게 업힌 비루먹은 수컷의 반질반질한 눈에는 미동이 없었다. 이제 곧 저물어버릴 가을과 한해 앞에 그들은 일생에 단 한 번이자 마지막의 짝짓기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끔 찌찌거리며 참새 떼가 볏논에 앉았다 날아오르기를 반복하다 문득 불어오는 건들바람이 딸랑딸랑 허수아비에 달아놓은 요롱을 깨우는 쇳소리에 푸르르 날아올라 봇둑너머 성 밖 뜰로 날아가기도 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강원도 금강산 일만 이천 봉 팔만 구 암자 유점사 법당 뒤 칠성당에 모여앉아 팔자에 없는 아들딸 나달라고 백일정성을 말고 타관객지 외로이 떠난 사람 괄시를 마소.
기출이의 노랫가락이 바뀔 때쯤 끝님이가 땅꾼들의 움막 앞을 지나고 있었다. 다행히 땅꾼도 뱀들도 보이지 않았다. 뱀들이 독이 바짝 올라 약발이 가장 좋다는 가을철부터 초겨울에 걸쳐 신불산, 간월산 같은 깊은 산골짜기를 헤매며 능구렁이, 너불대, 까치독사, 살모사, 칠점사 같은 온갖 뱀들을 잡아 폐병 든 부잣집에 팔기도 하지만 수입이 없는 여름철은 장터골목을 떼거리로 돌아다니며 각설이타령으로 동냥도 하고 특히 초상이나 잔치가 나면 친척이나 마을사람 누구보다도 먼저 도착해 끝이 날 때까지 진을 치는 그 얼굴도 입성도 모두 새까맣고 눈만 반질반질한 사람들이 다행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 그들도 씨름마당 한 구석에 진을 치고 뱀을 팔거나 국밥집을 얼씬거리며 동냥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이구, 되 죽겠다. 사내란 건 원래 모두 고 모양으로 인정머리가 없는 것인가, 우째 그래 우리 아부지하고 똑 같노? 넘이사 죽거나말거나 꼭 지 할 일만 하는 것이. 넘은 방금 되서 숨이 넘어가는 판에 그놈의 노랫가락은 무슨 가락이고?”
말을 불평하면서 끝님이의 얼굴을 환하게 웃고 있었다. 행상집 뒤를 돌아 넓은 솔 그늘에 들어서면서 끝님이가 재빨리 기출이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손가락 사이로 자기 손가락들을 밀어 넣었다. 찌질한 땀과 함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며 끝님이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하는데 저도 겁이 나는지 기출이의 손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정선읍에 물나드리 허풍선이 궁굴대는 사시장철 물거품을 안고 빙글빙글 뱅글뱅글 요리조리 조리요리 비잉글 잘도 돌아가는데 우리 집에 서방님은 돌아오지 않네.
산허리께 반듯한 무덤가의 상석 앞에 나란히 앉으며 다시 ‘아리랑 아리라앙’ 2절을 뽑으려던 기출이의 노래가 뚝 그쳤다. 미처 앉기도 전에
“기출아, 기출아아-”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끝님이의 입술이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누부야, 이라면 안 된다.”
밀어내는 시늉은 했지만 물컹한 촉감과 후끈한 땀 냄새와 비릿한 살 냄새에 기출이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벌써 다섯 해나 객지를 떠돌며 선창가나 숯가마, 동네머슴들의 초당방 여기저기서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못간 노총각들이나 초로의 텁석부리영감들이 막걸리에 젖은 목소리로 귓가에 대고 ‘우리 이쁜 기출이 어디 고추가 생겼나 보자.’ 속삭이며 몸을 더듬거나 입을 맞추려는 봉변을 당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 주막집아줌마들로부터 "기출이 니는 사내가 우째 그래 회창회창 여자같이 생겼노? 그 촉촉한 눈빛이 장차 계집께나 울리겠다."며 은근히 다가와 얼굴이나 머리를 쓰다듬다 등이나 허리 심지어 바지춤을 더듬던 주모들도 있었고 그런 밤에 저도 모르게 몽정(夢精)을 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 늘 궁금하다 못해 신비스럽기만 한 여자, 그것도 이팔청춘 끝님이가 온몸을 던져오는 데는 오히려 몸이 사려지는 것이었다.
“무슨 노래가 다 그렇노? 이별 아니면 한 이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노래라도 좀 재미있고 정분나는 것으로 해봐라.”
민망해진 끝님이가 말을 돌렸다.
모수야 적삼 새 적삼에 분통같은 살결보소
많이 보면 병날 게고 쌀 낱만큼만 보고가소.
그물 놓자 그물 놓자 우물가에 그물 놓자
자나잔 처녀 다 빠지고 실한 큰 처녀 걸려주소.
사대부집 연당 안에 연밥 따는 저 큰 아가
연밥줄밥 내 따주마 백년가약을 나랑 맺자-
“그 모숭기소리 아이가? 그래 창가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자, 봐라. 여기 이 큰 아가가 말이다.”
부끄럼이 사라졌는지 빼꼼하게 눈을 뜨며
“기왕 시작한 거. 거 한 곡 더 해봐라.”
다시 슬그머니 손을 잡더니 자기 가슴께로 잡아당겼다.
샛바람반지 하단(下端)장
너무나 추워 못 보고
나루건너 명호장
선가(船價) 없어 못 보고
골목골목 부산장
질 못 찾아 못 보고
미지기 짠다 밀양장
싸게를 묵어서 못 보고
고개 넘어 동래장
다리가 아파 못 보고
아가리 크다 대구장
너무도 넓어서 못 보고
이산 저산 양산장
산이 많아서 못 보고
우루루 갔다 울산장
하도 바빠 못 보고
언제 볼까 언양장
어정 어정 못 보고
들락날락 입실장
문이 닫혀 못 보고
남실남실 남창장
물이 깊어서 못 보고
코 풀었다 흥해장
미끄러워서 못 보고
깎아 말린 감포장
딱딱해서 못 보고
이리저리 못 보고
장꾼신세가 말 아니네
이 장 저 장 못 보고
장타령만 하는구나.
“그 참 머리도 좋다. 그 많은 걸 우째 다 외았노?”
다시 손을 내밀어 자기의 허리 깨로 당기는 것을 밀쳐내다 잔디밭에 나동그라진 둘이 마주보며 빙긋 웃다 갑자기 끝님이가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더니 부끄러운 듯 몸을 돌려 나란히 누웠다.
“그라지 말고 누부야도 창가 하나 해봐라.”
멋쩍어진 기출이 말하자
“그라까? 근데 내가 아는 노래가 있어야지.”
한참 망설이던 끝님이가 마침내 자장가 한 자락을 시작했다.
왈강달강 서울 가서
밤을 한 되 받아다가
살강 밑에 묻었더니
머리 깎은 새앙쥐가
오며가며 다 까묵고
밤 한 알이 남았구나
껍질 벗겨 할매 주고
보내 벗겨 엄매 주고
알맹이는 불에 구어
니캉 내캉 같이 묵자.
“누부야, 참 잘 하는데.”
“잘 하기는 머로 잘 해. 나는 그냥 니라면 다 주고 싶다. 한 알 남은 밤이고 또 무엇이고 내가 가진 건 다 주고 싶다. 아니 하늘에 달이라도 따다 주고 싶다.”
“피이_”
다시 마주보며 웃는데 슬며시 손을 빼낸 기출이가
“누나 눈 감아봐라.” 제안하자 끝님이가 두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아어 기출이가 새까맣게 잘 여문 잔디 씨 한 이삭을 끝님이의 입속으로 넣으려는데
“내 이럴 줄 알았지.”
눈을 번쩍 뜬 큰님이가 기출이의 손을 밀어내다 다시 둘이 잔디밭을 몇 바퀴나 데굴데굴 굴렀다. 엎치락뒤치락 구르던 둘이 문득 어느 순간 끝님이의 배위에 올라간 기출이의 눈과 입과 가슴이 딱 마주치며 아랫배에 뜨끈한 기운이 뻗치자 동시에 소스라치게 놀란 둘이 등을 돌리고 누웠다.
“도대체 어디서 뭐를 하고 살았노? 장터에서 너거 둘째, 셋째 형님들만 만나도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니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났다.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2021년 4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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