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이보기 기출이 ④언양읍의 주민일동이 삼가 순무사께 올립니다
아아, 갑오(甲午)년!
쉰이 훌쩍 넘은 초로의 석암선생도 아직 그 해의 혼란과 난리법석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젊어 경주용담의 신인(神人) 수운(水雲) 최제우선생이 내세운 후천개벽의 동학에 심취, 사람이 곧 하늘이고. 밥이 곧 사람이라는 신념으로 한때 2대접주 해월(海月) 선생을 좆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특별히 전라도의 남접이 성급했던지 아니면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는지 마침내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의 사발통문 한 장으로 궐기한 동학군이 전라도를 휩쓸고 충청도를 삼키면서 썩어빠진 관군을 물리치고 마침내 후천개벽이 오려는 순간 청나라와 왜국의 군대가 몰려오고 동학군이 괴멸되고 녹두꽃이 떨어져 삼천리의 민초들이 피눈물을 쏟은 그런 한 때였던 것이다.
어찌어찌 난을 넘긴 조정에서는 모든 민폐를 근절하기 위해 일본식으로 행정기구를 개편하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을 펼치기도 했지만 이듬해 을미사변으로 국모 민비가 시해당하는 등 500년 조선왕조의 몰락이 비로소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다.
거기다 언양읍은 저 먼 신라시대 화랑의 터전에서 고려 이후 망국의 귀양지가 된 후로 이제껏 버림받은 변방이었지만 아직도 면면히 이어오는 화랑의 기백과 정신이 영남 일원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를 받아들여 수많은 순교자를 낸 후 송대마을에 성당이 들어서고 간월산 너머 으쓱한 죽림굴에 성자(聖者) 김범우가 은신한 이후 밀양과 언양의 무지렁이 농민들이 천주의 가없는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받아들여 죽림굴을 중심으로 간월산과 오두산의 가파른 산길을 넘어 상북면 살티와 궁근정, 순정과 길천공소가 들어서고 고헌산을 넘고 백운산을 타고 직동과 선필, 인보로 공소가 번져가는 문명에 눈을 뜬 마을, 깨친 고을이었다.
거기다 별서 약관에 별감을 지낸 능산의 성필건을 비롯해 반송의 박재하, 지내의 오인영, 최지형, 둔기 신성호, 거리 이규천, 대곡 이장혁등 대체로 서른 전후의 청년들이 기울어가는 대한제국을 지탱할 젊은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배움의 터를 마련하고자 언양청년회를 결성하고 당시 군수인 이제인의 도움을 얻어 관아의 학당인 공사재(恭士齋)를 인수하여 200평의 마당에 19평의 건물 두간을 지어 사립 영명학교을 열고 이영정 교장이 취임한 지가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 말하자면 어느 지방보다 자각과 주인의식이 강한 곳이었다.
그런 고을의 일선에서 가렴주구를 일삼다 마침내 탄핵된 기록이었으니 아무리 젊은 한때의 일이라 해도 그 서류 자체가 모 호방으로서는 평생 잊지 못 할 불명예요, 수치이며 그 일을 들먹이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경(黥)을 친 듯 고개를 못 들 일인데 거금을 들여 소장(訴狀)을 입수해 꽁꽁 감추어둔 것이 다시 밖으로 유출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그 소장(訴狀)의 내용은
彦陽一邑住民等狀
(언양읍의 주민일동이 삼가 순무사께 올립니다)
謹言至寃情由段伏惟 閤下上奉
우측에 쓴 저희들의 원통한 정상이 이 지경에 이르러 삼가 계단에 엎드려 순무사합하께 올립니다.
聖上之綸音布諭嶺民雖放辟難化之民咸曰大哉
어진 임금께서 윤음을 내려 효유하시기를 비록 산골에 사는 백성들은 함부로 도망하고 피하여 왕업으로 순화하기 힘들지만 백성의 대부분이라 그들이라 하신지라
王言堯舜之化復行於今擧所所然有喜色而山谷父老或流涕而往聽
임금의 말씀은 먼 옛날 성군이신 요순임금의 덕화를 다시 이루려하셨으나 지금에 이르러 백성들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기보다 산골의 나이든 노인들이나 떠도는 유량민의 울음소리만 왕왕 들리니
詔環嶠南七十一州孰不化內之民哉於乎 所謂本縣如編小邑而饑饉荐臻獘瘼層生噫彼愚民 緣於無恒産無恒心出於萬死之計以 祛獘圖生之意煽動衷心之於
임금께서 조칙을 돌린 영남 71주에서 어찌 왕업에 덕화되지 않은 자 있으랴마는 소위 본현처럼 소읍으로 편성된 읍에는 기근으로 고꾸라지고 병들어 자리를 깔고 드러누운 애달픈 백성들이 늘 재산이 없어도 늘 꼭 같은 마음으로 만 가지 죽을 고비에서 빠져나오려 힘쓰며 소매가 닳도록 충심을 다하여도
營邑紛拏之境罪難容貸己至刑配之地然
관리들이 읍을 경영하는 것이 어지럽고 정신없어 이미 낯선 곳에 유배를 보내기에 이를 만큼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閤下父母也民者孺子也子也之於父母雖怒不悅以揵之流血涕泣以隨之故玆敢呼泣于
합하는 부모이며 백성들은 어린아이들이라 아이들은 부모가 비록 노하여 기뻐하지 않아도 문을 닫고 피를 흘리며 울더라도 부모를 따르게 되니 이를 감히 슬피 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孔遂之下伏乞
구멍에 들어가듯 엎드려 빕니다.
特憐孝子入井之罪而細細採納焉生等陷於本縣吏牟昺善牟匡憲之術中巳無可言而
착한 아들이 우물에 빠진 것처럼 특별히 불쌍히 여기사 그 지은 죄를 세세히 캐어내소서. 저희들은 우리 현의 아전 모병선, 모광헌의 꾀에 빠져 이미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巡營
영내를 돌며 확인하여
題飭若是截嚴而噫彼 兩牟用何幻術及其戶所質査之境反爲甲非乙是此曲彼直狀 民崔敬斗徐有琫咸錫祚三人民望 夷房金錫斌 並嚴刑枷囚至於捧遲晩之地彼不過 爲民祛弊而陷於重辟 是遣奸猾汚吏 晏然歸家暗生害民之計而 更囑官家各樣公納稱云 時急在邑殘民數數牌捉日日杖囚 去弊新反反受奸吏之毒箭 若此不已則 一懸之民必至離散之境 言念及此可謂痛哭者也
우리의 이 억울함을 엄하게 끊으려면 양 모아전의 어떠한 속임수나 호구조사의 잘못을 갑은 옳고 을은 나쁘고 저것은 굽고 이것은 옳다고 신칙하여 그 진상을 명백히 밝히소서.
또 최경두, 성유봉, 함석조 3명의 바라는 바, 이방 김석빈도 아울러 엄한 형에 처하여 족쇄를 채워 잡아들여 몽둥이로 때린다 해도 백성들에겐 그저 늦어 한 일뿐입니다.
백성을 위하여 폐단을 제거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중의 폐가 되는 것이 바로 간악한 관리를 파견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을 괴롭히는 계책만 짜내는 자들을 관가에 다시 위촉하여 각종의 공납을 만들어 매우 급하다며 다 흩어지고 얼마 남지 않은 읍민에게 여러 패를 지어 압박하며 나날이 족쇄를 채우고 감옥에 가두니 이 새삼스런 나쁜 관리들의 독화살의 민폐를 거두어주소서.
만약 이를 빨리 시행하지 않으면 언양 일현의 모든 백성이 죄다 흩어지는 폐단을 피할 수 없으니 말하고 생각나는 것 모두가 통곡할 일 뿐입니다.
洞燭敎是後伏乞 別遣廉探詳査顚末是白 遣捉致上項吳吏數年上納恣滯之錢一一督刷而
부디 통촉하여주시기를 엎드려 비오니 별도로 사람을 보내 전말을 상세히 조사하여 명백히 밝히시고 또 사람을 보내 위에 적힌 牟씨 아전들을 잡아들여 수년간의 상납을 함부로 지체하여 착복한 것을 일일이 감독하여 바꾸어주소서.
殿舍修理錢千有餘兩 村民討索四千餘兩 這這推尋是乎 遣本縣民吏可罪者罪之獘瘼可祛者祛之而明
읍청사 수리에 1,000여량, 촌민의 토색질로 4천여 량을 일일이 추심하소서. 본현에 파견하여 지방아전 중 죄지은 자는 죄주어 백성의 폐단과 병든 자를 치유하여 일일이 밝히소서.
聖綸之本意千萬積善之至謹冒昧以陳
임금님의 성스러운 윤음의 본뜻은 천만가지 적선이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베풀어지는데 있는 것일 겁니다.
行下向敎事
이 일에 대한 가르침을 내려주소서.
宣撫使閤下 處分
선무사 합하의 처분을 바랍니다.
甲午十月日
갑오년(1894년) 시월에
李子善 李德奇 卞文燁 蔡鶴逑 朴尙斗 姜太益 鄭用昊 鄭現奎 徐尙範 朴泰圭 鄭在基 金鎭旭 徐台振 崔暎洪 姜岫璜 金致斗 辛正浩 林柄九 安斗坤 崔世洪 楊斗運 000 安鍾瑞 成泰辰 禹燦東 宣永澤 趙必文 辛贊浩 朴道英 金景秀 權宜昊 金基綠 嚴成儀 徐昌植 金允石 崔鶴先 姜振香 李永奇 金石仲 金在憲 韓應文 鄭珉淳 辛正浩 禹鍵東 申永植 尹永凞 田石範
이자선 이덕기 변문엽 채학술 박상두 강태익 정용호 정현규 서상범 박태규 정재기 김진욱 섵진 최영홍 강유황 김치두 신정호 임병구 안두곤 최세홍 양두운 000 안종서 성태진 우찬동 선영택 조필문 신찬호 박도영 김경수 권의호 김기록 엄성의 서창식 김윤석 최학선 강진향 이영기 김석중 김재헌 한응문 정민순 신정호 우건동 신영식 윤영히 전석범 (번역 이득수)
이렇게 끝을 맺고 있고
중간 중간에 순무사의 답변과 붉은 색 마패가 찍혀 있으나 그 글씨가 심하게 날려 쓴데다 너무 오래되고 종이마저 구겨져 석암선생마저도 완전히 해득할 수는 없으나 대략 아래와 같으며
상세히 조사한바 가을이 오면 만여 량을 바치게 하고 그래도 밀린 것은 모 아전 등을 곤장치고 가두어 엄히 다스릴 테니 그리 알고
언양고을 역시 그 칠십일 주에 들어가느니
읍청사수리에 금년부터 3원씩을 풀고 단계적으로 어려운 비용을 충당하려하고 봉수지기 7량, 군보 6량등을 풀었고 무명베 수십 필은 모두 닳아져 그 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당초 발고된 두 사람을 3개 읍을 돌며 조사하였으나 읍청사 등은 잘 준공되었으며 또 이 탄원서를 낸 사람들은 그리 알라.
또 그런 포원진 바가 있다하더라도 그렇게 읍청사가 잘 수리되었으니 어찌 토색질이라 할 것이랴?
이렇게 끝을 맺은 마지막을 보며 도대체 어떻게 이 소장이 추궁 당사자의 하나인 모 호방에게 돌아왔는지 참으로 의아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의뭉스런 조호방이 은근히 협박하거나 돈을 주고 매수했을 수도 있고 소장을 낸 우두머리 소두(疏頭)나 그 서류를 보관한 자의 본인이나 자손이 가난을 못 이겨 팔아먹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떡하랴? 속속들이 썩어버린 이 아수라의 세상에서...
...안 그래도 서촌댁의 눈에 늘 밟히던 아이였다. 세상에 제 자식 남의 집에 보내고 맘 편하게 잠들 어미가 있으랴만 어린 아들 셋을 단지 입하나 줄이려고 남의 집에 보낸 서촌댁은 잠에서 깨는 아침이마다 아이들 생각이 간절했다. <계속>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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