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두고 메로 가는 사람은 없다. 순편한 길을 걷지 수풀에 생채기를 내며 구태여 산을 걸을 턱이 없다. 물길을 거슬러 헤엄쳐 나아가려 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역류(逆流)를 버텨낼 재간이 없다.
메가 아니라 길로 걷고, 역류가 아니라 순류(順流)를 타는 것이 자연의 이치고, 곧 순리이다. 한데 굳이 길을 마다하고 메를 선택하고, 순류를 마다하고 역류를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들이 순리대로 행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순리’(順理)란 ‘理’에 ‘순’(順)하는 것으로, ‘이치에 따른다’는 말이다. 이치를 거슬러 행동하면서 저들은 왜 이치대로 산다고 생각할까? ‘이치’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릇 용(龍)이란 짐승은 길들여서 탈 수 있다. 그런데 그 턱밑에 직경 한 자 정도의 거꾸로 박힌 비늘이 있다. 만일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이고 만다. 군주에게도 마찬가지로 역린(逆鱗)이란 것이 있다. 설득하는 자가 능히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으면 그 설득은 기대할 만하다.” -『한비자』/「세난(說難)」-
‘세’(說)란 권력자에게 자기 의견을 진술하여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하는 방법이 쉽지 않다는 뜻에서 ‘난’(難)이라고 한다. 한비자는 ‘세난’의 예로서 위 인용문 앞에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옛날에 미자하(彌子瑕)가 위(衛)의 군주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다. 위나라 법에 군주의 수레를 몰래 타는 자는 월(刖, 발을 절단하는 형벌)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이 들었다. 어떤 사람이 밤에 은밀히 가서 미자하에게 알렸다.
미자하는 거짓을 꾸며서 군주의 수레를 빌려 타고 나갔다. 군주가 전해 듣고 그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효자다. 어머니의 병고 때문에 발이 잘리는 벌까지 잊었구나’라고 하였다.
그 후 어느 날 군주를 모시고 과수원에 놀러갔다. 복숭아를 먹다가 너무 맛있어 다 먹지 않고 그 반쪽을 군주에게 먹였다. 군주가 말하기를,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 좋은 맛을 잊고서 나를 먹여주는구나’라고 하였다.
그런 뒤 미자하의 용모가 쇠퇴하고 총애가 엷어지자 군주에게 책망을 들었다. 군주가 말하기를, ‘미자하가 훨씬 이전에 거짓을 꾸며 내 수레를 몰래 탄 일이 있고, 또 전에 먹다가 남은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일이 있다’고 하였다.
미자하의 행동은 처음과 변함이 없다. 그러나 전에 칭찬받던 똑같은 이유로 그 뒤에 책망을 듣게 된 것은 애증이 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주에게 총애 받고 있을 때는 그 생각이 군주의 뜻에 알맞아 더욱 더 친밀해지지만, 군주에게 미움 받고 있을 때는 그 생각이 군주의 뜻과 맞지 않아 책망을 듣게 되고 더욱 더 소원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언(諫言)을 드리거나 담론(談論)를 펴고자 하는 사람은 군주로부터 자신이 총애를 받는가 미움을 받는가를 살펴서 확인한 뒤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비자』의 저자 한비(韓非, ?~BC 233)는 전국시대 말기 법가(法家)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2천 몇 백 년 전의 당시 정치체제에 대한 혜안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봉건전제체제에서 제후국인 위나라의 주권은 군주에게 있었다. 하여 주권자인 군주의 ‘역린’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간언의 성패는 군주의 애증에 달려 있음은 자명하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체제는 어떠한가? 조선시대는 왕조국가였다. 곧, 주권이 왕에게 있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어디에 있는가? ‘大韓民國은 民主共和國이다. 大韓民國의 主權은 國民에게 있고, 모든 權力은 國民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1조 ⓵⓶항)
대한민국은 ‘민국’이다. 왕조국가의 주권은 왕에게 있고, 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이미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임시 헌장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포했다. 곧 대한민국은 왕정이 아니라 민주공화정이라는 선언으로, 주권은 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고 천명한 것이다.
한데 독립 이후에도 ‘국부’(國父), ‘국모’(國母)하는 용어가 횡행했고, 최근에는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비난도 자주 접할 수 있다. 법의 왕인 헌법에서 ‘주권자는 왕이나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다’고 분명히 밝혔는데도 왜 이런 시대착오적인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헌법이란 ‘허울 좋은 하눌타리’,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일까?
필자는 이에 대한 대답을 김진한(1966~. 헌법연구관, 헌법학 박사,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역임)의 『헌법을 쓰는 시간』(메디치/2017)에서 얻었다.
「헌법은 ‘국가권력을 제약하고 길들여 시민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약속의 규범’이다. 모든 권력과 법 위에 존재하는 ‘최고의 법’이다. 따라서 모든 법과 권력을 복속시키는 최고의 효력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헌법에는 강제수단이 없다. 헌법으로부터 기원하는 모든 법들이 가지고 있는 강제력을 정작 헌법은 갖고 있지 못하다. 그 효력을 거부하는 권력에게 복종을 강제할 수 있는 물리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헌법은 최종적 효력을 국민에게 의존한다. 국민들이 헌법의 내용을 알고, 최고 권력도 헌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고 있을 때만이 권력으로 하여금 순순히 따르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헌법은 제정에 의해 존재하는 법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 내용 그대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을 때, 비로소 존재하고 효력을 발휘한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강하다. 비록 내란 수괴와 그 공범들로 인해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에서 ‘결함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로 퇴보하였지만, 회복탄력성은 강하다. 왜냐?
민주주의란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란 믿음이다. 이 믿음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 한데 헌법은 강제력이 없다. 제 노릇을 못하는 ‘허울 좋은 하눌타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이 헌법 내용을 알게 되고, 그 내용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면, 헌법은 강제력을 갖는다. 힘을 갖게 된다.
헌법 제1조 ⓵⓶을 가사로 만들어 노래 부르는 국민은 세계에서 대한민국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세계 민주주의를 선도하는 이유이다.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 같지만, 실은 국민이 하는 것이다’ 우리 헌법과 세계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 적실한 구호이다. 그러나 이 구호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나라 또한 대한민국밖에 없다.
봉건제 제후국의 군주나 왕조국가의 왕의 뜻을 거역하면, 역린을 건드리면 간언이 통하기는커녕 간언자의 목숨까지 위험해진다. 군주나 왕이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어떤 정치인이 위험하게 될까? ‘국민의 뜻’을 거역하는 자이다. 국민이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주권의식이 세계에서 가장 확고한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이치에 따른다’는 순리. 아직도 그 이치를 ‘군주나 왕의 뜻’에 두는 시대착오적인 정치인이 있다. ‘내란 수괴’의 뜻을 아직도 헤아린다. 물론 공범관계여서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다. 2천 여 년 전의 제후국이나 왕조국가에서의 이치를 ‘민국’(民國)의 이치와 분별하지 못하는 아둔한 이들이다.
단언컨대, 이치를 착각한 정치인들은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확실히 도태될 것이다. 민국에서 제후국이나 왕조국가의 이치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지금까지도 얼마간 통용되었다. 이제 이 가치전도는 끝장에 왔고, 민국의 이치가 확실히 토대를 구축할 것이다.
하여 이번 제21대 대통령 선거는 대한민국 나아가 세계 민주주의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 역사의 전환점에서 미약한 힘이나마 보탬을 명예롭게 생각한다.
<작가,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