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누적이 현재이고, 현재의 누적이 미래이다. 하여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한 얼굴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내일의 얼굴을 알고 싶으면, 오늘의 생각과 행동을 되짚어 볼 일(메타인지, meta-cognition)이다. 지금 무슨 생각과 행동을 누적하고 있는가?
연거푸 5일을 친구 비닐하우스 취나물 수확을 도왔다. 노동 강도가 센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이며 근력을 사용해야 하는 육체노동이다. 모든 일은 체계적이다. 정해진 일감과 그에 맞는 수의 일꾼이 투입되므로 개인은 사라지고 체계만 남는다. 일을 함에 있어, 개인은 독립적일 수 없다. 체계에 개인을 맞춰야 한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 번씩 근력노동을 할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생각과 행동의 관계이다. 생각과 행동은 한 몸일까, 혹은 별개의 두 몸일까? 두 몸이라면 선후관계나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것일까?
걸을 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을 하려고 작정하고, 산책을 할 때도 깊게 생각하기는 참 어렵다는 것을 경험상 안다. 하물며 근력노동을 함에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육체노동을 할 때는 일의 끝남을 향해 부지런히 땀을 흘릴 뿐, 생각이란 언감생심이다. 여러 번 ‘생각거리’를 갖고 생각하려 시도해 봤다. 생각할 수 없었다.
“인간은 하나의 연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자연 중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무찌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무찌른다고 해도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자보다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주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그의 사고(思考)에 있는 것이다.” -파스칼/생각(Pensées, 팡세)-
저 위 우주에서 바라보면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지표면의 71%를 덮은 바다와 대기 산란 현상으로 푸른빛을 띠는 지구는 ‘푸른 행성’으로도 불린다. 어느 해양학자가 우리 행성을 땅을 가리키는 ‘지구’(地球)보다, 물을 가리키는 ‘수구’(水球)로 불리는 게 더 어울린다고 주장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의 주장은 데카르트식으로 말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귀하다”이다. 이 명제는 그럴 듯하다. 우리의 입맛에 맞기 때문이다. 사람은 종종 입맛에 맞으면 객관적 사실은 돌아보지 않는다. 지구보다 수구가 더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지만, 이에 신경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람은 세상을 자기 존재의 한계 내에서, 인식의 범위 내에서 재단하고, 그걸 진실이라고 믿는 편향이 있다. ‘생각’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논의는 달라지겠지만, ‘인간을 존귀하게 하는 생각’은 적어도 생존이나 성 선택과 같은 동물적·본능적 욕구 충족을 위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파스칼 시대, 17세기 중반의 프랑스에서 ‘생계형 생각’을 넘어선 ‘존귀하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 당시 프랑스 사회는 삼부회 체제라는 엄격한 계층 구조로 운영되었다.
제1신분은 성직자 계층으로 사회도덕과 신앙의 기준을 제시했다. 전체 인구의 1% 정도로 추정된다. 이들은 세금 감면과 같은 다양한 특권을 누렸다.
제2신분은 귀족 계층으로 정치, 군사, 사회 전반의 주요 권력을 장악했다. 2~3% 정도의 인구가 귀족으로 분류되었다. 이들은 봉건적인 특권과 함께 재산, 토지 소유를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3신분은 평민 및 농민으로 전체 인구의 97%를 차지했다. 도시의 부르주아(중산층 및 상공업계 인사)와 농촌의 대부분의 농민, 도시 빈민 등 다양한 하층민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무거운 세금 부담과 사회적 제약 속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으며,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사회 경제의 근간을 이루었다.
파스칼은 성직자나 귀족처럼 특권계층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부르주아(도시 중산층)였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경제적 기반 하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생계형 생각’을 넘어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3신분인 농민은 전체 인구의 80~85%였는데, 이들은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생존 문제에 일생을 바쳐야 했다. ‘인간을 존귀하게 하는 생각’을 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파스칼은 “인간을 무찌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관점을 달리한다. 인간/우주, 인간/자연이란 대립쌍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무장하고 안 하고, 죽이고 자시고 할 게 없다.
인간은 우주나 자연 속의 극히 일부를 구성하는 극히 미미한 존재이다. 인간의 생겨남과 없어짐(生滅), 삶과 죽음은 우주나 자연 속의 아주 자연스런 일개 현상일 뿐이다. 우주나 자연은 인간의 오고감에 관심하지 않는다. 우주나 자연의 입장에서 인류 전체가 하루아침에 모두 절멸해도 ‘그냥 그러려니’하고 무심해 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중심주의’ 혹은 ‘인간이기주의’ 입장에서는 우주나 자연에서 인간만 쏙 빼내어, ‘인간/우주나 자연’의 대립쌍을 만든다. 우주나 자연 속에 인간이 속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우주나 자연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이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억만 걸음을 양보해 그렇다손 치더라도, 인간을 죽이기 위해 우주나 자연은 무장을 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저절로, 아니 스스로 망해가기 때문이다.
보라! 윤석열이나 김건희, 내란 공범들, 법관 조희대와 지귀연 등등을!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길을 만들어 오늘에 도착했다. 어제의 생각들과 행동들이 ‘오늘의 이들’이 있게 한 것이다.
이들은 ‘생계형 생각’ 이상의 ‘생각’을 할 겨를(여유)이 있었다. 한데 왜 ‘존귀하게 하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