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46 여름과 가을 사이 - 구름 운동회

이득수 승인 2021.09.04 16:30 | 최종 수정 2021.09.04 16:41 의견 0
명촌리 고래뜰에서 본 신불산-간월산 능선 위 '구름 운동회' [사진 = 이득수]

아침 내내 엄청난 쏟아지던 하늘빛이 차차 엷어지더니 어느새 빗방울이 그치면서 고래뜰 건너 안산이 말간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째 산책을 못한 제가 신을 신기도 바쁘게 진작부터 기다리던 마초가 저만치 앞서가더니 돌아서서 천천히 다가가는 저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마초의 등 뒤에 이제 막 연두 빛 벼 이삭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초록벌판을 배경으로 여태 들판과 마을에 머물던 구름이 꾸물꾸물 뒷산으로 물러가는 것이 산꼭대기에 이르러 무엇이 급한지 달리기라도 하는 듯 빠르게 영남알프스의 준령을 휘감아 가지산과 신불산의 능선을 먹어버리기도 하고 뱉어버리기도 하는 모습이 마치 구름 운동회라도 열린 것 같았습니다.

매일 보던 벌판과 마을과 뒷산과 하늘이 이렇게 포근하고 다정하게 다가오다니요. 어쩜 우리가 태어나기 전 엄마의 뱃속에서 아무 걸림도 두려움도 없이 그냥 둥둥 떠다닐 때의 기분이 이리 안온했을까요? 배냇짓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한참 들길을 걸어가니 이번에는 평소 아스라이 높고 날카롭던 신불산 공룡능선의 칼바위가 구름 사이로 간신히 얼굴을 내밀다 잠깐 사라지고 한참 있다 다시 고개를 드는 그름의 조화가 마치 공작시간이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지금 한 무리의 구름어린이들이 찰흙을 한 줌 쥐고 꽃과 나비와 강아지와 고양이와 비행기와 탱크까지 저 넓은 하늘의 도화지에 제 맘대로 무엇인가를 빚어 늘어놓는 것만 같은 저 숨 가쁜 변화처럼 여러분도 양손에 구름 한줌씩 쥐고 친구들이나 우마차, 장독간이나 엄마 얼굴 같은 오래된 기억속의 형체를 주물러보시기 바랍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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