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49 가을의 길목 - 천사의 나팔꽃

이득수 승인 2021.09.09 13:24 | 최종 수정 2021.09.09 13:56 의견 0
나팔꽃

저기 오롱조롱 매달린 우아한 꽃송이를 좀 보십시오.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천사의 나팔(엔젤트럼펫)이란 꽃입니다. 노지에 심으면 얼마나 잘 자라는지 감나무처럼 크고 많은 가지에서 저 커다란 꽃송이가 수십 개나 주렁주렁 열려 장관을 이룹니다.

그러나 워낙 땅을 많이 차지하고 추위에 약해 처음부터 화분에다 심고 너무 많이 자라지 않게 초여름에 미리 가지를 잘라주어야 제 철에 알맞은 꽃이 피고 날씨가 조금만 추우면 온실로 옮겨주어야 하는데 얼어 죽지만 않으면 이듬해에 꺾꽂이를 해도 잘 살아납니다. 귀한 꽃이긴 하지만 만만한 꽃도 아닙니다.

저 수십 개의 트럼펫을 볼 때마다 저는 제대로 잘 구색을 갖춘 오케스트라를 연상합니다. 이름이 천사의 나팔인 만큼 헨델의 <메시아>나 <할렐루야>의 멜로디를 떠올리기도 하고요. 그러나 모조리 아래로 늘어진 꽃송이를 보면 울타리를 챙챙 감고 올라가는 토종 나팔꽃보다 어딘가 어설프고 엉성한 느낌이 듭니다. 아무리 잘 봐준다 해도 저 분홍빛이 도는 꽃은 황금빛 플루트정도로, 또 하얀 꽃은 동체가 긴 트롬본정도로 연상하면 될 것 같다가도 주둥이를 아래도 늘어뜨린 것이 동그란 호른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정답하고는 한참이나 먼 것 같습니다.

대신 이 꽃은 향기가 얼마나 진한지 이른 아침이나 밤늦게 다가서다 너무 진한 향기에 깜짝깜짝 놀랄 정도라 저 우아한 나팔에서는 아름다운 멜로디 대신 마랄린 먼로의 샤넬5보다도 더 진하게 사람을 빨아드리는 고혹적인 향기가 흘러나온다는 느낌이 다 듭니다. 아무튼 <천사의 나팔>이 핀 뜨락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헨델의 음악을 듣는 일이야 뭐 어떨라고요.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