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꿈꾸는 도연명' 8 - 오류선생 흉내내기

이득수 승인 2021.09.02 18:46 | 최종 수정 2021.09.03 17:14 의견 0
(사진은 제 유년시절 평리마을 전경, 뒤쪽의 큰 마을은 언양읍, 가운데는 태화강상류 남천내입니다. 추석날 앞산으로 성묘 가는 대열 중에 이모라는 조그만 소년하나가 끼어있다고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필자 유년시절 어느 해 추석, 평리마을 사람들이 들판을 줄지어 걸어가고 있다.

 

이래저래 아무리 떼를 쓰고 우겨도 도무지 어느 하나 도연명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운명적으로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큰 밑천이 드는 것도 아닌 아호나 하나 멋지게 지어 도연명을 극복하려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원래 아호(雅號)란 친구들이 지어주는 것으로 죽마고우(竹馬故友)나 동문수학의 친구가 지어주는 미칭(美稱)으로 개성과 전도(前途), 앞으로의 바람을 담아 다정하게 부르기 좋고 정감이 가며 은연중에 품격이 드러나는 또 하나의 상징이랄까 인품 같은 무엇이겠지요.

그러나 장삼이사, 별 특징도 없이 그냥 바쁘게 현대를 살아가는 제 친구들 중에 한학을 배우거나 그런 고전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이 없으니 가히 바랄 것도 없이 아호마저 자작으로 지을 수밖에요.

40대 중반에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나도 필명이나 아호하나는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름대로 <들풀>과 <평리(平里)>라는 필명 둘을 지어 60대 초반 부산문단의 중견문인들에게 슬쩍 띄워보았는데

“아호가 들풀이라는 건 좀 이상하잖아? 평범하기보다는 천박하고 하찮은 느낌도 들고.”

“아닙니다. 촌놈으로 태어나 대도시에서 허덕이는 제 삶 자체가 들풀이 아니라 잡초 같다는 생각을 늘 해왔으니까요.”

“그래도 그건 아니지. 이 시인이 뭐 어때서? 직업 좋고 문장 좋고 술 잘 먹는 것만 보더라도...”

해서 다음으로 평리를 이야기하니

“그것 멋지네. 경주에 동리(東里)라면 언양에 평리라.”

제 모교인 언양국민학교에서 열린 두 번째 시집의 출판기념회에 와본 임명수 시인이 적극적으로 찬동하더니 다음부터 만날 때 마다

“어이, 평리야, 요즘 글 많이 쓰나?”

하고 불러주어 어느 새 아호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도잠의 호 연명(淵明), 즉 맑은 연못 또는 호수에 비해 평리는 너무 평이(平易)하고 운치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도연명의 연(淵)은 넓고 아늑하며 버드나무나 행인, 심지어 붉은 꽃이 가득한 산 그림자까지 비치는 호수, 연(蓮)이 자라고 물새가 나는 명경지수(明鏡止水)가 떠오르는 참으로 훌륭한 호라 단지 제 태어난 마을의 이름을 김동리(東里)라는 대가의 호와 같이 마을 리(里)자가 붙었다고 끌어댄 짝퉁의 호와는 품격이 다릅니다.

그래서 명촌에 들어온 이후 휴대폰의 사진촬영이나 컴퓨터의 일반 기능이라도 좀 배워 젊은 사람을 따라가려는 진화하는 노인 진옹(進翁), 또 수십 개의 아호를 가진 추사 김정호가 말년에 병든 몸을 비탄하며 지은 쇠옹(衰翁)을 흉내내려 해도 무단복제나 도용 같아 포기했습니다. 결국 단 하나의 가능성, 제 멋대로 짓는 아호마저 도연명에 미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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