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平里) 선생의 '꿈꾸는 도연명' 2 - 나의 왕국 율도국
이득수
승인
2021.08.27 18:11 | 최종 수정 2021.09.0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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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한창이던 40대 중반에 문단에 등단해 세상 모든 것을 내 시(詩)안에 녹여낼 것처럼 자신만만한 시절 《꿈꾸는 율도국》이란 시집을 낸 적이 있다. '애기동장(洞長)'란 별명이 붙도록 마흔넷 너무 젊은 나리(事務官)가 되어 기고만장한 나는 내 관할 남부민동 천마산기슭에 6·25피난민들이 흔히 목격했다는 산토끼를 복원시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전 동민을 선동해 한바탕 굿(?)을 벌였다.
전국의 매스컴을 진동시킨 산토끼방사행사는 결국 오리탕집으로 의심되는 자들이 밤에 토끼굴을 습격, 몽땅 잡아가는 바람에 공연히 방사에 동참한 남부민초등학교 어린이들만 울리고 말았지만.
그 때 그런저런 사연을 담은 시집을 내자 안 그래도 무겁고 엄격한 동장이란 직책과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시인이 도무지 연결이 안 된다고 나를 60대의 영감쯤으로 생각하던 부산에서 꽤나 알아주는 젊은 시인들과 문예부기자의 패거리(그들이 자기들만 문학을 좀 알고 나 같은 공무원은 시인이라는 자체가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아주 개무시를 해 당시 나도 화가 단단히 났음)들이 보기와 달리 참으로 천진난만한 꿈을 가진 이상한 나라의 나으리라고 웃었다.
그 때 한 늙은 시인(60년대 신춘문예 출신의 귀족시인)이 "그 단순하고 감성적인 시들이 결코 명시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누가 무얼 포폄할 자격은 없다, 요즘 시인들은 감성의 꽃을 피우는 사람이 아니라 은박지로 조각을 하는 손기술이 좋은 사람들"이라면서 "시는 둘째 치더라도 최소한 '꿈꾸는 율도국'이란 시의 제목, 시집의 제목을 들고 나올 사람은 드물다"고 부산문단에서 유일하게 박수를 쳐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후에도 남의 가슴을 울릴 시, 최소한 스스로 대표작이라고 내세울 시 한 편을 쓰기는커녕 그런 제목조차 떠올리지 못했고 이미 팔순이 되었을 노시인의 생사도 모르고 있다.
이제 생각해 보니 가난한 농촌 출신으로 자라나 너무나 복잡한 도시와 살벌한 공직세계에 팽겨진 채 이리저리 부대끼며 간신히 살아가던 젊은 날의 내가 뭔가 새로운 세상, 가난하고 힘들며 외롭기까지 한 나의 현실을 도피하거나 그 완강한 압제의 껍질을 깨트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요즘 산골에 들어와서 살면서 내가 진정으로 꿈꾸던 것은 교산 허균의 미완의 혁명, 홍길동을 앞세운 거창한 율도국이 아니라 쌀 닷 말에 지조를 굽힐 수 없다고 스스로 평택현령의 인끈을 풀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외치며 귀향, 시와 국화로 생애를 마감한 소박한 도연명(陶淵明)을 꿈꾼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 역시 한 때는 졸지에 주어진 조그만 권력에 도취해 아름다운 실패를 하고 말았지만...
지금은 아득한 기억 저 편인 야심만만한 마흔네 살 동장시절의 시 한편을 올린다.
꿈꾸는 율도국12
-칙령(勅令)-
비오는 날엔 음악 들으세요.
부둣가 사람들은 소주 마시고
바다 쪽 창문에 전등 켜고
도란도란 예기해 봐요.
-여기는 율도국
슬픈 사연 가진 사람 살 수 없는 곳-
개인 날에는 창을 여세요.
들장미 한 그루 없는 집에도
바다가 보이는 게 멋지잖아요?
떠나는 배를 보며 손 흔드세요.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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