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52 가을의 길목 - 물봉선, 꽃의 바다에

이득수 승인 2021.09.09 13:05 | 최종 수정 2021.09.12 13:50 의견 0
물봉선
물봉선

올해 추어탕에 부쩍 맛을 들인 아내가 하루는 자다 말고 “당신, 죽을라면 내게 먼저 통발 놓는 법을 가르쳐 주고 죽으소.”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죽고살고가 어디 내 마음대로 되나?”

“그러니까 죽지 말라는 말이지.”

주고받다 올가을부터는 통발을 놓는데 조수로 따라다녀 한결 일이 수월해졌습니다. 그런 아내가 한 번은 이렇게 소리칩니다.

“야, 이 빨간 꽃 좀 봐! 완전히 꽃의 바다네.”

벼를 심지 않은 묵정논에서부터 논두렁과 도랑을 거쳐 산비탈까지 물감처럼 번지는 붉은 꽃을 가리키며 “이름이 물봉선이야. 자세히 보면 봉숭아처럼 통통하고 붉고 꽃모양도 닮았지?” 합니다.

“진짜 그러네.”

“개그우먼 신아무개를 닮았기도 하지?”

“아아, 그 웃기는 봉선이.”

“집에 캐다 심을래?”

“아니 그 만큼 예쁘지는 않아.”

아내는 금방 시선을 거두었습니다.

한문에 면추(免醜)라는 좀 멋쩍은 단어가 있습니다. 얼굴도 보지 않고 혼례를 치르는 양반 댁 도령이나 작부가 딱 한 명밖에 없는 주막에 가는 사내들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상대 여성이 다행히 예뻤으면 좋겠지만 최소한 추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아주 이기적이면서도 여성 비하적인 낱말입니다. 언젠가 한글사전에서 사라져야 할 단어라고 하겠지요.

저 단순하게 붉기만 한 저 물봉선도 어쩌면 그저 면추나 한 정도의 꽃일 수도 있습니다. 또 무한정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장터나 갱빈에 모인 수많은 시골여인들처럼 특별함이 드러나지 않는 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터의 여인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사연과 향기가 있고 어떤 고난도 묵묵히 헤쳐나가는 야무지고 당당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물봉선 역시 그런 조선의 꽃인 것입니다.

산이고 들이고 길이고 어디에건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지천으로 피는 꽃인 만큼 여러분도 관심을 갖고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갱빈은 강변(江邊)의 언양 사투리임)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