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62 가을의 노래 - 고추잠자리

이득수 승인 2021.09.09 13:16 | 최종 수정 2021.09.17 14:25 의견 0
명촌별서 고추잠자리와 늙은 시인
노시인과 고추잠자리

고추밭에 날 때는 그냥 잠자리였다. 빨갛게 고추가 익으면 아랫도리가 빨갛게 익어버린 따라 쟁이 고추잠자리...

첫서리에 고춧대가 맥없이 시들 때쯤 혼자 황홀한 코스모스를 찾아가다 눈이 너무 부셔 안경을 썼지만 꽃무리 자꾸 번져 겹겹이 콘택트렌즈를 끼어 볼록 눈이 되었다. 날개에 꽃 빛을 담으려 망사조끼를 입고오기도 했다. 그래도 좀체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코스모스, 가녀린 가지에 앉지 못해 오래 맴돌다 해질녘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코스모스, 아름답지만 너무 눈부신 소녀(少女)들, 안경 쓴 소년(少年)들의 그리움으로 가득 찬 하늘을 맴돌던 새까만 점들이 하나둘 말없음표(...)로 흩어져 텅 빈 하늘. 그리고는 시리도록 새파란 천공(天空) 깊숙이 마침내 가을이 저물어갔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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