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어제 묵었던 '아스트로가' 공립 알베르게이다. 아침 7시 번이 넘었으나 아직 날이 완전 새지 않았다. 사진= 조해훈
오늘은 2024년 11월 13일 수요일이다. ‘아스트로가’(Astroga)의 옛 교회를 공립 알베르게로
용하고 있는 이 건물에서 아침 7시 반쯤 나왔다. 아직 날이 개지 않아 어두웠다. 알베르게 바로
에 또 교회가 있다. 그 앞을 지나는데 1층에 로마 시대의 주거지 등을 발굴한 후 유구(遺構)를 전시하고 있었다. 바닥층을 고고학적으로 조사해 건물의 구조와 건축 시기, 생활상 등을 파악한 후 일반인들에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공립 알베르게 앞 다른 교회 건물 1층 아래에 로마 시대 유적이 발굴 후 전시되고 있다. 사진= 조해훈
그 교회를 지나니 바(Bar)가 있어 거기서 아침으로 밀크커피와 자그마한 빵 한 조각을 먹었다. 바에서 나와 조금 더 걸어가니 큰 광장인 마요르광장(Plazaa Mayor)이 나왔다. 에스파냐광장이라고도 불리는 마요르광장에는 3층짜리 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건물에는 호텔과 바, 레스토랑 등의 간판이 붙어 있는데 이른 아침이어서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건물들 가운데에 아스트로가 시청사(Ayuntamiento de Astroga)가 있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쌍둥이 첨탑이 있고 가운데에 종탑이 있다. 이 시청사는 1683년에 건축을 시작해 1704년에 완공됐다고 한다.
왼쪽 교회 건물 1층에 로마 시대 유적이 전시돼 있고 사진 저 멀리 가운데서 약간 오른쪽에 보이는 교회가 '아스트로가' 공립 알베르게이다. 사진= 조해훈
광장을 지나 걸어가니 초등학교가 있다.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엄마와 조부모들의 모습을 보곤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트로가 마요르광장이다. 사진= 조해훈
초등학교를 지나 도로를 따라 좌회전을 하니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쳤다. 그런데 저 앞에 오래된 교회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양식의 건축물이 눈에 확 들어왔다. 세상에,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물이다. 레온에서 가우디가 지은 보티네스 저택을 보곤 이 도시에서 또 다른 그의 건축물을 만난 것이다. 길쭉한 광장의 끝에 산타 마리아 대성당(Cathedral of Santa Maria)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가우디가 건축한 아스트로가 주교관(궁)이 있다.
왼쪽 건물이 아스트로가 산타 마리아 대성당이고, 오른쪽 건물이 가우디가 건축한 주교관이다. 사진= 조해훈
필자의 뒤로 보이는 바로코양식 건물이 아스트로가 시청사이다. 사진=
산타 마리아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 위에 고딕·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건물이라고 건축가들은 말한다. 성당 내부의 성모상은 스페인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으뜸가는 성모상이라고 한다. 이 대성당은 11~13세기에 있었던 르네상스 성당을 확장한 것이다. 15세기 말부터 시작된 증축 공사는 18세기까지 이어졌다.
아스트로가 산타 마리아 대성당 옆에 가우디가 건축한 주교관 앞에서 필자. 아침 햇살이 주교관 위로 번지고 있다. 사진= 다른 순례자
아스트로가라는 이 작은 도시는 순례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특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로마 시대의 요새답게 여러 유적과 중세 성당들이 있다. 기원전 14년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건설한 ‘아스투리카 아우구스타’가 지금의 아스토로가라고 알려져 있다. 기원후 4세기께 성벽이 세워지면서 도시가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로마 성벽은 13세기에 재건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친 로마 성벽 위로 15세기 대성당과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주교관 아래에서 보면 아스트로가 주교관 역시 로마 성벽 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마 시대의 유적은 시내 곳곳에 남아 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가우디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 이를테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구엘공원(1900~1914)·구엘궁전(1886~1889)·카사 밀라(1906~1910)·카사 비센스(1878~1888)·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성가족 성당·1883~1926)·카사 바트요(1904~1906)·콜로니아 구엘성당(1908~1917)과 아스트로가 주교관(1887~1889)·벨레스구야르드 저택(1900~1909)·레온의 보티네스 저택(1892~1893) 등이다.
가우디는 1887년 아스트로가 주교관 설계 의뢰를 받아 건축했으며, 이듬해부터 2년간(1888~1889) 주교관을 증축했다. 주교관은 현재 카미노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층에는 로마 시대의 역사적 기록과 유물, 북부 스페인의 주요 교역과 군사 등에 관한 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필자가 산타 마리아 대성당과 주교관 건물을 보는 찰나였다. 햇살이 주교관 위로 비쳐 주교관은 마치 동화에 나오는 성(城)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건물 동쪽의 둥근 현관과 하늘 높이 서 있는 첨탑이 마치 공주님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성처럼 느껴졌다. 한참 동안 주교관의 안팎과 대성당을 둘러본 후 오전 9시 8분 순례자답게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주교관을 지나 대성당 옆길로 걸었다. 대성당 옆에 작은 성당인 산타 마르타 성당도 찬찬히 보았다. ‘아, 내가 다음에 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이유가 여기에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트로가 마트에 우리나라와 같은 밤을 팔고 있다. 사진= 조해훈
오전 9시 20분, 도로변에 마트가 있어 들어갔다, 과일을 몇 개 샀다. 우리나라처럼 밤도 팔고 있었다. 신기했다. 마트에서 나와 도로를 따라 산티아고 표식 등을 보며 걸었다. 오전 9시 41분, 주유소 한 곳이 있다. 날이 밝아지니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 있다. 오전 10시, 도시 ‘아스트로가’가 끝난다는 표지판이 있다. 10분 더 가니 삼거리에 자그마한 교회가 있다. 순례길은 도로를 따라 계속 이어졌다. 2분 정도 더 가니 발데비에하스(Valdeviejas) 마을이 끝난다는 표지판이 있다.
아스트로가를 벗어날 무렵 청명한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 있다. 사진= 조해훈
도시 아스트로가를 벗어난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사진= 조해훈
오전 10시 21분, 나무 십자가가 서 있고, 산티아고까지 260.5km 남았다는 표지석이 있다. 여기까지 아직 레온(Leon)주에 속하는 모양이다. 표지석에 ‘Leon’이라 적혀 있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다. 날씨는 제법 차갑다. 오전 10시 40분, 수양버들이 노랗게 단풍 들어있다. 단풍 든 수양버들은 처음 본다. 오전 10시 45분,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Murias de Rechivaldo) 마을 입간판이 있다. 여기서 3분 더 걸어가니 돌로 쌓은 담장이 두드러져 보이는 큰 집이 한 채 있다. 길고 멋있는 돌담이다. 길은 마을 안으로 연결돼 있다. 마을에 돌과 흙으로 담을 쌓은 집이 이어져 있다. 모두 오래된 집들이다.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 마을 직전 순례길에 노랗게 물든 수양버들이 있다. 사진= 조해훈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 마을 초입에 돌로 쌓은 길고 예쁜 담장이 있다. 사진= 조해훈
오전 11시 25분, 마을에 자그마한 카페가 있어 들어갔다. 점심 때가 다 되어가는 데다 어디에 또 카페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커피만 한잔 마셨다. 카페에서 나와 50m쯤 걸으니 한 할아버지가 집 앞에서 햇볕을 쬐고 계셨다. 지나면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니, 할아버지는 “날씨가 추운데 이리와 햇볕 좀 쬐고 가시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할아버지 옆에 나란히 섰다. 햇볕이 따뜻했다. 마침 지나가는 마을 주민이 있어 사진 한 장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할아버지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할아버지는 “우리 할멈은 집 밖을 안 나와. 집 창문으로 내가 뭘 하나? 별일 없나? 창문으로 자주 쳐다봐.”라고 말씀하셨다, 필자가 할아버지 집 창문을 보니 정말 작고 통통한 할머니가 창으로 우리를 보고 계셨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더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길을 떠났다.
'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 마을 카페에서 점심으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오다 햇볕을 쬐고 계시는 한 할아버지를 만나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 마을 주민
오전 11시 34분, 이제부터 도로를 벗어나 본격적인 흙길이다. 표지석에 산티아고까지 258.7km 남았다고 적혀 있다. 낮 12시 16분, 다시 도로를 만났다. 도로를 건너 도로 옆으로 난 흙길을 걸었다. 하늘은 청명하고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부드럽게 떠 있다. 날씨가 좋고 길도 걸을 만하여 기분이 덩달아 좋다. 걷는 동안 길도 다르지만 구름도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길에 나무도 많아 청량감을 더해준다.
낮 12시 21분, 여전히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떠 있다. 사진= 조해훈
낮 12시 52분, 철제 아치형의 문이 순례길에 세워져 있어 반겨준다.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사’(Santa Catalina de Somoza) 마을 표지판이 있다. 잠시 앉아 쉬는데 마을 주민들이 개를 데리고 운동하러 나왔다. 이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에 바가 있는데 태극기가 걸려있는 게 아닌가! 고마운 마음에 들어가 커피라도 한잔 마시려고 보니 문이 닫혀 있다. 마을은 돌과 흙으로 지은 집들이 쭉 이어져 있다. 마을 안으로 더 들어가니 사람이 살지 않아 허물어진 집들이 있다. 그런 집들을 보니 마음이 안타까웠다. 그 집들의 역사와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해 보았다.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사' 마을을 벗어나니 길가에서 84세의 할아버지께서 몇가지 소품을 팔고 계셨다. 사진= 조해훈
마을을 벗어나 도로 옆으로 이어진 흙길을 걸었다. 하늘의 구름은 마을로 들어오기 전 모습과는 또 다르다. 아마 순례자가 지루하지는 않을까 봐 일부러 모습을 바꾸는 모양이다. 오후 1시 30분, 길에서 한 할아버지가 소품 몇 가지를 팔고 계셨다. 연세를 여쭤보니 84세라고 하셨다. 마을과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 그의 집 바로 앞이다. 집에 계시다가 순례자들이 걸어오는 게 보이면 나와서 물건을 파신다.
'산타카탈리나 데 소모사' 마을 입구에서 운동하러 나온 주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조해훈
오후 2시 40분, 산티아고까지 250.7km 남았다는 표지석이 있다. 이곳에는 이런 표지석이 자주 나타나 좋다. 지역마다 산티아고 길을 알려주는 표식이 모두 다르다. 필자가 여기까지 걸으면서 가장 아쉬운 지역이 피레네산맥 구간이었다. 가장 위험한 그 구간에 이처럼 표식이 잘 되어 있었다면 그렇게 고생을 하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사' 마을에 우리나라의 태극기가 바깥에 걸린 카페가 있다. 커피를 한잔 마시고 가려했으나 아쉽게도 문이 닫겨있었다. 사진= 조해훈
이제 엘 간소(El Ganso)라는 마을이다. 마을 들어가는 입구부터 고풍스러운 돌담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에 들어서니 돌과 흙으로 지은 집들이 줄을 지어있다, 여기도 사람이 살지 않아 무너진 집들도 제법 있다. 아마 어르신들이 사시다 돌아가신 후 이처럼 허무하게 집이 무너졌을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더 심한 것 같다. 마음이 아프다. 저 집을 처음 지을 때 많은 돌을 옮겨와 사람들이 하나하나 쌓았을 테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대를 이어 살면서 집을 수리하였을 것인데, 이렇게 무너져 있으니 안타까움을 넘어 슬프기까지 하다. 마을의 교회 또한 집들과 비슷한 스타일로 건축한 걸로 볼 때 상당히 오래되었을 것이다. 교회 역시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것 같고, 옆 건물도 무너져 있다. 다행히도 사람이 살고 있는지, 담벼락을 수리한 집도 있다. 이 집을 보니 무척 반가웠다.
'엘 간소' 마을에는 빈집이 많았으나 이처럼 담벼락을 수리해 살고 있는 집도 있다. 사진= 조해훈
오후 2시 44분, 마을을 벗어나 흙길의 순례길로 접어드니 철로 된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이제 하늘은 약간 흐릿해진다. 빗방울이 조금씩 돋는다. 오후 3시 41분, 산티아고가 246.6km 남았다는 표지석이 있다. 오후 3시 49분, ‘황금의 카르바얄 루트’(Ruta El Carballal Del Oro)라는 산악지대 표지판이 일반 마을 표지판과 달리 고동색 바탕에 크게 세워져 있고 나무로 만든 벤치도 있다. 여기서부터는 흙길 오르막이다. 오후 4시 4분, 길옆에 철망이 조금 쳐져 있다. 그 철조망에 순례자들이 나무를 주워 십자가를 만들어 놓았다. 필자도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 가로 세로로 작은 십자가를 대충 하나 만들어 꽂았다.
오후 3시 41분, 산티아고까지 246.6km 남았다는 표지석이 있다. 사진= 조해훈
오후 3시 41분, 이제부터 ' 황금의 카르바얄 루트'라는 산악지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사진= 조해훈
하늘은 여전히 납빛이다. 오후 4시 35분, 드디어 오늘의 종착지인 ‘라바날 델 카미노’(Rabanal Del Camino)마을 간판이 길가에 서 있다. 5분을 더 걸어 마을에 도착했다. 산골 마을로 모두가 돌로 지은 집들이다. 오후 4시 42분, 마침내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마을에 집이 몇 채 되지 않은 작은 마을이다. 알베르게 역시 작은 건물이다. 방은 2층에 있었다. 들어가니 아주 작은 거실이 하나 있고, 크지 않은 방 한 개가 있다. 이 알베르게에서 오늘 숙박할 순례자는 필자까지 포함해 총 5명뿐이다. 주인아저씨에게 물어보니 마을에 다른 알베르게는 없다고 했다.
'황금의 카르바얄 루트' 라는 산악지대 표지판을 지나자 오르막길이다. 사진= 조해훈
오르막길 구간에 철망이 있고 순례자들이 나뭇가지를 주워 철망에 십자가를 만들어 꽂아 놓았다. 사진= 조해훈
방에는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만큼의 공간만 있고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침대에 짐을 풀어놓고 거실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하니 안에서 한 남자가 샤워한 후 팬티만 입고 나왔다. 이어 필자가 들어갔다. 샤워부스가 있어 옷을 벗고 물을 틀었는데 찬물만 나왔다. 그러지 않아도 날씨는 초겨울이었는데,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추웠다. 이미 몸에 물을 적신 상태여서 너무 추워서 물만 끼얹고 나왔다. 추워 오들오들 떨렸다. 필자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다. 다행히 주인아저씨가 거실에 있는 자그마한 난로에 불을 지폈다. 순례자들이 추워 모두 난로 앞에 앉았다. 난로의 불이 크게 따뜻하지는 않았으나 필자도 함께 조금 앉아있었다.
오후 4시 42분,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인 산골마을 '라바날 델 카미노'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사진= 조해훈
들락거리던 주인아저씨가 “여기서 나가 앞 골목으로 조금만 가면 작은 슈퍼마켓이 하나 있습니다. 저녁거리는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슈퍼마켓 인근 교회에 한국인 신부님이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라고 주변 상황을 알려주었다. 다른 순례자 두 명과 필자는 슈퍼마켓으로 갔다. 말이 슈퍼마켓이지 구멍가게였다. 이 마을에 묵는 순례자들을 위한 가게였다. 필자는 빵 한 개와 우유를 산 후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다른 순례자들과 하나뿐인 작은 거실 테이블에 앉아 함께 저녁을 먹었다. 필자 옆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왔다는 순례자가 앉았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는 조용한 편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그와 몇 마디 나누다가 너무 추워서 얼른 침대로 와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침대에 누워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인터넷도 되지 않은 데다 나갈 데도 없고 너무 추워 그 상태로 그냥 잠을 청하기로 했다. 다른 순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누워서 오늘 걸어온 길을 곰곰이 생각하다 다음에 다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면 아스토로가에 하루 더 묵고 싶었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과 가우디가 건축한 주교관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오늘은 아스트로가에서 라바날 델 카미노까지 19.8km를 걸었다. 오늘 순례길의 고도는 859~1153m였다. 생장에서는 총 531.6km를 걸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