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마르틴 델 카미노'의 비에이라(Vieila) 알베르게에서 아침으로 나온 라면과 흰쌀밥. 사진= 조해훈
오늘은 2024년 11월 12일 화요일이다. 오전 7시에 알베르게에서 아침 식사를 하기로 돼 있다.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예약해 두었다. 씻고 배낭을 꾸린 후 거실로 나가 식탁에 앉았다. 주인아주머니가 라면과 흰쌀밥을 가져왔다. 라면과 흰쌀밥이 어찌나 맛있던지 한 톨의 밥도, 라면의 면발 하나도 남기지 않고 국물까지 다 마셨다. 웬만하면 이 알베르게에 느긋하게 하루 더 묵으면서 이곳에서 주는 음식을 더 먹고 싶었다. 하지만 낮에 이 인근에 가서 글을 쓰면서 있을 만한 카페가 없었다. 알베르게에는 오후 늦게 들어와야 하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인사를 하고 알베르게를 떠났다. 왼쪽 발뒤꿈치가 좀 나았다고는 하나 하루 더 배낭을 부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비용이 만만찮아 그냥 메고 나왔다. 오전 8시쯤이었다.
순례길 옆 농가 창고 앞에 베어 낸 옥수수 다발이 쌓여있다. 사진= 조해훈
밖으로 나오니 바로 도로였다. 아침 햇살이 조금씩 비치고 있었다. 오전 8시 38분 이제 ‘산 마르틴 델 카미노’(San Martin Del Camino)마을을 벗어난다는 표지판이 있다. 표지판은 마을 글자에 사선으로 붉은 줄이 그어져 있다. 이제부터 ‘산 마르틴 델 카미노’ 마을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입간판을 지나자 우회전하라는 표지판이 있다. 5분가량 걸으니 오른 편에 베지 않은 옥수수밭이다. 옥수숫대가 누렇다. 이어 순례길은 도로를 따라 직선으로 뻗어 있다. 조금 더 가니 또 베지 않은 누런 옥수수밭이 오른편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순례길에 낙엽이 쌓여 있다. 이 구간을 걸으니 우수가 밀려왔다. 사진= 조해훈
오전 9시, 순례길은 도로에서 약간 비켜나 흙길로 이어졌다. 역시 베지 않은 옥수수밭이 이어졌다. 옥수수밭 저 너머로 하늘이 맑다. 하늘이 아직은 그다지 진하지 않으나 잉크색으로 변하고 있다. 오전 9시 5분, 오른편 밭에 창고가 한 채 있고 그 앞에 베어낸 옥수수 다발이 잔뜩 쌓여 있다. 조금 앞에 왼쪽으로 거름을 쌓아놓았다. 우리의 농가와 다르지 않다. 소똥으로 만든 저 거름을 밭에 뿌려줄 것이다. ‘날씨가 화창하고 이 정도의 흙길이면 오늘 걸을 만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길 옆 창고에서 한 아저씨가 일을 하고 있다. 사진= 조해훈
다시 순례길은 왼쪽에 도로를 끼고 직선으로 뻗어 있다. 오전 9시 35분, 순례길에 떨어진 나뭇잎이 잔뜩 깔려 있다. 이런 길을 만나면 어김없이 감상에 젖는다. 우수가 몰려들어 울컥해진다. 사람의 마음이 그만큼 나약한 것이다. 환경에 따라서 금방 마음이 움직이니 말이다. 순례길을 따라 잎을 거의 떨군 나무들이 즐비해 있다. 왼편의 삭막한 도로와는 대조적이다. 오전 10시 11분, 280.6km 남았다는 표지석이 있다. 그 앞에서 지나는 한 순례자에게 부탁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산티반츠 데 발데이글하시아스' 마을의 교회 맞은편 벤치에 앉아 있는 필자. 사진= 다른 순례자
오전 10시 15분, 긴 창고 하나가 있다. 물류창고인 것 같았다. 그 앞에 봉고가 서 있고 한 아저씨가 일을 하고 있다. 5분가량 더 가니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 마을 입간판이 서 있다. 마을로 들어서니 마을을 관통하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 많지 않은 집들이 쭉 늘어서 있다. 역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 첨탑 위에 새들이 집을 지어놓았다. 맨 꼭대기에 독수리 크기의 허연 새가 한 마리 움직이고 있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마을 주민에 따르면 로마 시대 때 지어졌다는 오래된 다리 위를 한 할아버지가 걷고 있다. 사진= 조해훈
길은 어느새 바닥에 돌을 박은 돌길로 바뀌었다. 이 돌길은 제법 긴 교량 위로 연결되어 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개울이 하늘색을 닮아 진한 잉크색이다. 마침 다리를 지나는 동네 할아버지에게 “이 다리가 아주 멋진데 언제 만든 겁니까?”라고 여쭸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자세한 건 잘 모르나 마을 주민들은 로마 시대 때 만들어진 다리로 알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필자도 대충 그럴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 로마 시대에 만들었다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있는 베키오 다리와 스페인의 살라망카 로마 다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마을의 다리 끝 부분 아래 도랑을 치우고 있다. 사진= 조해훈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마을의 다리 길이가 족히 100m는 되는 것 같다. 옛날에는 다리 아래 개울에 물이 많았으리라. 강폭이 아주 넓다. 다리 끝부분에 또 자그마한 도랑이 있다. 인부 두 사람이 작업복을 입고 도랑 청소를 하고 있다. 아마 이곳 행정관청에서 나와 작업하는 모양이다. 다리를 건너니 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슈퍼마켓이 있어 들어가 봤다. 마을 슈퍼마켓이어서 크지는 않다. 둘러보니 살만한 게 없어 계산대 옆에 있는 바나나 한 개를 샀다. 슈퍼마켓에서 나왔다. 왼쪽 골목길 안쪽으로 보니 카페가 하나 있다. 오전 11시이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잔 마셨다. 카페에서 나오니 바로 앞 길가에 큰 개 한 마리가 점잖게 앉아 있다. 목줄이 기둥에 묶여있는 걸로 봐서 아마 주인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다.
다시 슈퍼마켓 앞으로 나와 걸었다. 교회가 있다. 큰 마을은 아니나 마을 중심에 교회가 있고, 그 앞에 차가 많이 주차돼 있다. 마을 길 가운데는 아까 건넜던 다리처럼 예쁜 자갈돌이 깔려 있다. 전체적으로 누런색의 마을 분위기와 역시 같은 색의 돌길이 잘 어울린다. 마을 끝부분에 아담한 사립 알베르게가 깔끔하게 있다. 그 앞을 지나니 곧장 순례길이다. 흙길이다 보니 마을의 예쁘고 깨끗한 길과는 비교가 된다. 같은 흙길이라도 모습이 모두 다르다. 길 양쪽으로 인공적으로 심은 나무들이 쭉쭉 뻗어 있다. 베지 않은 옥수수밭이 겨울 풍경처럼 약간 을씨년스럽게 마른 모습이다.
'빌라레스 데 오르비고' 마을의 잡화점 입구에 독특한 모양의 인형이 마치 사람처럼 의자에 앉아 있다. 사진= 조해훈
낮 12시 32분, ‘빌라레스 데 오르비고’(Villares De Orbigo) 마을이다. 입구에 마을 입간판이 서 있다. 몇 집 안 되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그런데 마을 안으로 5분가량 걸어가니 길에 재미있는 풍광이 있다. 사람 크기의 인형에 옷을 입혀 모자를 씌우고 신발을 신겨 의자에 앉혀 놓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여성이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인형의 주인아저씨가 바로 옆 창고에서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이것저것 물건을 팔고 있다. 낮 12시 43분, 그 마을의 마지막 집을 지나 또 순례길로 접어들었다. 흙길이 두 갈래인데 도로 바닥에 노란 화살표로 표시가 돼 있다.
'산티반츠 데 발데이글라시아스' 마을의 교회 건물 앞에서 순례자 두 명이 앉아 쉬고 있다. 사진= 조해훈
마치 숲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길 양옆으로 나무가 많다. 10분쯤 걸으니 들판 한가운데로 길이 나 있다. 길이 황토색이다. 낮 12시 55분, 길은 끝이 없어 보인다. 짐작으로 아직 5시간 정도는 더 걸어야 한다. 오늘은 하늘에 구름이 거의 없다. 진한 잉크색 하늘과 초록과 고동색, 누런색의 광활한 대지(大地)만 보인다. 풍경과 자연환경은 좋으나 오늘따라 혼자 걷는다는 게 지루한 기분이 든다. 아마 갈 길이 멀어서 일 게다. 살아 돌아다니는 생명체라곤 없다. 길짐승은 고사하고 날짐승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잠시 외로움이라도 든 것일까?
한 축산 농가에 젖소 송아지들이 개집처럼 만들어진 각각의 공간에서 살고 있다. 사진= 조해훈
오후 1시 8분, 길가에 양철지붕의 집 한 채가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시골 무허가 카페 같은 곳이다. 그나마 문이 닫혀 있다. 여하튼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집을 한 채 발견하니 반가웠다. 오후 1시 18분, ‘산티반츠 데 발데이글라시아스’(Santibanze De Valdeiglesias) 마을 입간판이 서 있다. 입간판 옆에 자그마한 창고 벽에 주민들이 일을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마을로 들어가니 돌과 흙으로 쌓은 교회 건물이 있다. 그런데 그 앞에 처음 보는 남성 순례자 두 명이 앉아 쉬고 있다. ‘저 사람들은 이 마을에서 숙박한 후 떠나려고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인 한 명과 동양인 한 명이다. 인사를 한 후 그 사람들 맞은편 벤치에 앉았다. 햇살이 좋아 필자도 좀 쉴 심산이었다. 서양인 순례자가 다가와 “사진 찍어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덕분에 필자는 사진 한 컷을 얻었다.
잠시 쉬다가 오후 1시 40분 다시 길을 나섰다. 3분가량 걸으니 길 양쪽으로 소를 키우는 목장이 있다. 젖소들이 울타리 안에서 누워 쉬거나 자고 있다. 거길 지나니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젖소의 송아지들이 큰 개집 같은 공간에 한 마리씩 들어있다. 필자가 다가가자 각자 집 안에서 나와 필자를 신기한 듯 쳐다본다. 필자 역시 그런 모습이 신기해 바라봤다.
하늘이 마치 푸른 비를 내릴듯 진하디진한 잉크색을 띠고 있다. 사진= 조해훈
그곳을 지나니 다시 또 황토색의 순례길이 이어져 있다. 다른 곳보다 다소 정겹게 느껴진다. 곳곳에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을 볼 수 있어서 그러리라. 시골의 흙길이 사람을 얼마나 포근하게 하고 정화하는지를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알게 되었다. 필자는 지리산에 들어가 햇수로 9년째 살고 있어 도시의 때를 다 씻어낸 상태다. 그런데도 마음이 마치 제월(霽月)되는(?) 느낌이랄까?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 걷고 돌아가면 필자의 마음이 훨씬 더 넓어지고 깊어질 것 같은 예감이다.
헤진 옷을 입고 있는 설치작품 같은 순례자의 모형. 사진= 조해훈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오후 2시쯤이다. 마치 먹구름이 잔뜩 끼듯 진하디진한 잉크색 하늘이 곧장 푸른 비를 내릴 태세다. ‘나는 어쩌면 이리도 복이 많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일상에 바빠, 또는 여러 사정으로 이곳에 오지 못한 많은 사람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오후가 되니 베지 않은 옥수숫대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진= 조해훈
오후 2시 3분, 약간의 오르막이다. 왼쪽에 하얀 십자가가 꽂혀 있고 그 옆에 독특한 모양의 순례자 모형이 있다. 설치작품 같다. 오랫동안 걷느라 옷이 다 헤진 순례자의 모습이다. 다리는 작은 자갈돌들로 채워져 있다. 오후 2시 10분, 저 멀리 앞에 순례자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다. 어디 나무 사이에 들어가 한숨 자고 가는 것일까? 여전히 짙은 잉크색 하늘이다. 분명 우리나라의 하늘은 저렇게 진한 파란색이 아니다. 물론 저 하늘이 우리나라의 하늘색보다 낫다는 말은 아니다.
'아스트로가' 마을 입구의 공장 벽면에 그려져 있는 스마일 그림. 필자는 그림을 보곤 씨익 웃었다. 사진= 조해훈
그런 길을 계속 걸었다. 하늘 구경하느라 주변 경작지 구경하느라 발걸음이 더 더뎌질 수밖에 없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필자는 이처럼 자연의 모습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받는 느낌에 좀 민감한 편이다. 감정이 많아서 그런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좀 더 민감하고 무른 편이다.
오후 3시 20분, 길가에 농가가 한 채 있다. 이 농가 사진을 내놓고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 농가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순례길에서 보는 마을의 흙과 돌로 쌓은 집이 아니라, 마치 임시로 만든 거처일 수도 있다.
오후 3시 52분, 큰 돌로 만든 만들어 세운 십자가가 있다. 아까 앞서가던 순례자가 그곳에 앉아 쉬고 있다. 인사를 하니 “사진을 찍어 드릴까요?”라고 했다. 필자도 그 순례자 사진을 찍어줬다.
마침내 오늘 10시간을 걸어 목적지인 '아스트로가'에 도착했다. 왼쪽 저 멀리 보이는 교회 첨탑 옆 옛 교회에 알베르게가 있다. 사진= 조해훈
그런 다음 또 길을 계속 걸었다. 오후 4시 10분, 순례자가 휴대용 물통의 물을 마시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다. 그 동상을 지나니 ‘산 후스토 데 라 베가’(San Justo De La Vega) 마을 간판이 있다. 마을 가운데로 들어가니 포장길이다. 집이 많지 않으나 마을 길은 깔끔하다. 오후 4시 28분, 흙과 돌로 건축된 교회가 있다. 보기에도 오래된 건축물이다. 잘 지어진 교회도 의미가 있지만, 역사성이 느껴지는 이런 교회에 사실 더 마음이 간다.
마을을 지나니 다시 흙길이다. 오후 4시 44분, 순례길 양옆은 베지 않은 옥수수밭이다. 오후 시간이 되어서인지 옥수숫대의 그림자가 길에 길게 드리워진다. 오후 4시 54분, 저 멀리 큰 마을이 보인다. 오후 4시 59분, 공장인가? 벽면에 ‘BUEN CAMINO’라고 적힌 익살스럽게 웃는 얼굴 그림이 있다. 스마일 그림이다. 필자도 그림을 보곤 속으로 씨익 웃는다. 아마 다른 순례자들도 이 그림을 보며 웃고 갔을 것이다. 땅만 쳐다보고 빠르게 걷는 순례자라면 웃을 기회를 한 번 놓치게 된다.
아스트로가'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설치된 지그재그식 육교. 사진= 조해훈
오후 5시 9분, 독특하게 구불구불하게 생긴 육교가 앞에 버티고 있다. 육교에 올라 걸으면서 ‘그냥 직선으로 만들지 않고 이렇게 요리조리 걷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생각해 봤다. 혼자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 육교를 건너 오후 5시 19분, 드디어 오늘의 종착지인 아스토르가(Astora) 입간판을 만났다. 여기서 좀 위쪽으로 걸어 마침내 오후 5시 30분께 알베르게 도착했다. 알베르게는 옛 교회 건물이었다. 오늘 그러고 보니 10시간가량을 걸었다. 오늘 ‘산 마르틴 델 카미노’에서 ‘아스트로가’까지 24.8km를 걸었다. 생장에서는 총 511.8km를 걸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