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뜻밖의 귀촌(12)
그러고서 한 이삼일 지나서였다. 명촌에 가봤자 대나무와 소나무를 베어내고 뿌리를 뽑아내는 일 밖에 열찬씨가 관여할 일도 크게 없을 것 같아 낮에는 주로 원동교 도시고속도로 다리 밑에서 바둑을 두는데
“이 선생이 우째 이틀 연속으로 나오시는데?”
“우리는 다리 밑 바둑공원하고 인연을 끊은 줄 알았는데?”
호적수 왕선생과 권영감이 반색을 하며 오랜만에 와서 수가 잘 안 보이는 열찬씨를 몰아붙이고는
“시골에 다닌다더니 사람이 변했나? 영 물 바둑이네.”
첫날은 희색이 만연하다 이튿날 열찬씨의 바둑이 다시 날카로워지자
“모질고 끈질기긴 여전하군.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도 이처럼 모질게 했소?”
“그런 편이긴 한데 내가 모질게 굴기보다는 모질게 구는 사람들을 견뎌낸다고 고생을 많이 했지요. 한마디도 고립무원(孤立無援)의 바닥에서 헤맨 날이 많았지요.”
“이제 시골에 집짓고 살 형편이면 그 모진 마음 좀 풀고 사시구려.”
“예. 그러지요. 오늘은 한두 점 씩 내려 드리지요.”
하며 평생 몸에 배인 습관, 내가 질 수는 없다,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 어떻게든 버텨야 된다는 마음을 버리고 건둥건둥 쉽게 두어 이기기보다는 지는 판이 많아 두 상대들이 하하 웃으며 좋아들 하는데 진동으로 해놓은 휴대폰이 달달 떨더니
“외삼촌, 큰일 났심더. 마침내 길에다 담장을 쳤심더.”
“그래 길을 완전히 막았나?”
“아임더. 자기 땅 경계라면서 한 1미터를 내어 보로꾸담을 쳤심더.”
“그럼 사람은 댕기겠고 차는?”
“담 친줄 모르고 들어오던 울산사람 우씨의 그렌저승용차가 반대쪽 옹벽을 긁어서 견적이 꽤나 나온 모양입니더.”
“큰일이구나. 일단은 알았다. 그리고 내가 무어라고 하기 전에 절대로 그 사람들 하고 싸우면 안 된다.”
“예.”
하고 나니 더 이상 바둑을 둘 정신도 아니라서 건성으로 마무리를 하고 천천히 수영강변을 걸으며 생각에 잠기다가 14층에 사는 박태국 지적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살다살다 이런 험한 꼴은 또 처음이네. 차라리 우리가 도자기 집과 그 옆을 지나는 국유지 농로에 대해서 경계측량을 신청해볼까?”
“그래서 어쩌시게요?”
“우선은 담장의 일부라도 헐어 자동차가 드나들게 해야 되겠지만 만약에 눈어림으로 친 그 담장이 조금이라도 길을 먹었으면 이번엔 우리가 반격을 하는 거지.”
“어떻게요?”
“도로무단점용과 업무방해로.”
“그게 쉬울까? 아무튼 좀 기다려보세요. 제가 울산시지적공사의 제 친구에게 알아볼게요.”
“알았어.”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저녁에 들어온 영순씨가
“또 무슨 일이 있어요? 당신 얼굴표정이 왜 그래요?”
“아, 아무 것도 아니야.”
정신이 번쩍 든 열찬씨가
“한 이틀 쉬니 몸이 근질근질하네. 내일은 아침 일찍 등말리로 올라가야지.”
하며 거실에 잠자리를 준비했다. 하마터면 담을 쳤느니 어쩌니 해서 또 한 바탕 소득 없는 싸움이 벌어질 번한 것이었다.
이튿날 사개이 버스정류소에서 내려 등말리 논길을 한참 걸어 또식씨 집앞 4거리에 도착하자
여기는 개인의 사유지임으로 외부차량의 출입과
특히 공사용 차량의 출입을 금함.
만약 이를 어길 경우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것임.
주인백.
폭 80, 길이 20센티 정도의 팻말이 도자기집 방향의 길가 향나무 밑에 박혀있었다.
(이게 뭐야? 아무래도 냄새가 나는데.)
어제까지 없던 통행금지 팻말이 붙은 것도 이상한데 공고자가 막연하게 주인백이라고 한 점, 구차스럽게 공사용 차량이라고 명시한 점 또 민형사상의 책임이라는 보통사람들이 잘 안 쓰는 행정용어까지 현재 진행 중인 건축을 막으려는 의도, 다분히 감정적인 발상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외삼촌, 여기 뿐도 아닙니다. 칼치못에 가는 도로에도 팻말이 붙어있어요.”
“그래. 니는 누가 이 팻말을 붙였다고 생각하나?”
“주인백이라면 반천에 산다는 산소주인 강씨네들이겠지요. 도자기집 가는 길 한쪽의 무덤옹벽과 그 반대쪽 엉개나무가 많은 밭이 모두 그 사람들 것이니까요. 또 칼치못에 가는 도로는 강씨네 땅을 옛날 단감집 대산영감이 진입로를 내면서 대충 밀어 붙였다고 하던데요.”
“대충 밀어붙이다니?”
“옛날에 대밭 안에 손씨네가 집을 팔고 떠났을 때 요꼬공장인가 직물회사를 크게 하는 반천의 강씨네가 선산으로 쓸려고 매입해서 그 강사장이 죽자 일곱 명의 아들이 옛날 집터에 산소를 쓰려고 하자 이웃주민인 우리 아버지와 단감 집에서 반대를 하고 뭐 그랬다고 하던데요.”
하는데 마침 금찬씨가 나타나며
“뭐라고 써놨노? 차 댕기지 말라고 써놨네.”
국민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잠깐 동안 수남마을의 야학에 다닌 일이 있어 더듬더듬 한글을 읽으며 눈치로 대충 짐작하는 누님이 딱해서 한참 바라보다
“참, 누님은 잘 알겠네. 여기 강씨네가 처음 산소를 쓸 때 무슨 일이 없었능교?”
“없기는? 땅을 사자말자 별로 필요도 없는 축대를 쌓고 배수로 도랑을 내고 난리가 나서 우리는 별 이상한 사람이 땅을 사서 돈 자랑을 한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집터를 산 강사장이란 사람이 가끔 등말리에 와서 너거 자형이랑 단감나무집 대산어른한테 앞으로 이웃으로 지낼 테니 잘 부탁한다고 했지. 그래서 다리가 아파 바깥출입이 힘들어 늘 심심한 너거 자영이 언제쯤 집을 지어서 이사를 오느냐고 물었지.”
“그래서?”
“집은 집인데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고 뭐라더라?”
“아, 사람이 사는 양택(陽宅)이 아니라 귀신이 사는 음택(陰宅)을 짓는다고 나중에 자신이 죽어 거기에 온다고 했겠지요?”
“우째 알았노? 동생 니가 정말 귀신이네.”
“그래서 그 다음엔 요?”
“그 강사장이 죽고 큰아들을 뺀 둘째, 셋째 아들이 웬 노인한사람을 데리고 찾아와서 너거 자영하고 단감집영감을 보고 초상이 나서 이틀 뒤에 저 집터에 산소를 쓴다고 마을주민들이 허락을 좀 해주면 좋겠다고 했지. 말하자면 낯선 노인은 터 잡는 지관인 모양이었지.”
“그래서요?”
“당시 나락농사가 재미가 없어 전부 농공단지공장에 댕기기나 농사짓는 영감들이 죽어 일곱 집이나 되던 등말리가 우리 집하고 대산떡 하고 정신이 온전 찮은 종근이 저가 아부지 셋 집 밖에 없었는데 종근이아부지야 있으나 마나고 너거 자영하고 대산떡 영감하고 둘이가 문젠데 말이야.”
“예. 그 때 자영하고 그 집 아들들 하고 무슨 이야기가 있었지요?”
“그렇지. 너거 자영은 옛날부터 동네 한가운데 낯선 사람의 상여가 지나가는 법도 없고 또 무덤을 쓰는 일은 더더욱 없다고 하면서 점잖게 조를 빼는 기 술잔이나 얻어먹을 생각 같았어. 너거 자영이 겉으로는 팩팩해도 잔정이 많아서 남이 사정하면 외면을 잘 못 하거든. 그런데...”
“그런데?”
“이튿날 대산떡영감이 옛날부터 사람이 길 내는 일, 셈 파는 일, 무덤 쓰는 일은 땅을 내어주지 않거나 막지 않는 것이 전통이라고 아무 조건 없이 허락을 하자는 것이었어. 평소에 절대로 내 것을 포기하는 일 없이 깐깐하게 따지기를 좋아해 가끔 시비가 붙어 법에도 갈 뿐더러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바람에 명촌경로당에도 재미를 못 보고 산전에 있는 상북면 노인회관에도 환영을 못 받아 늘 외톨이로 지내던 양반이 하루아침에 사람이 그렇게 호인이 될 수가 있나 말이지. 너거 자영이 하는 말이 틀림없이 단감 밭에 가는 길 내는데 산소 땅이 좀 들어가는 걸 허락받은 것 같다고 하면서 더 이상 싸우기 싫어 순순히 승낙했지. 그래서 산소를 쓰고 난 뒤 큰 상주가 너거 자영을 찾아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앞으로도 산소를 좀 잘 돌봐달라면서 산소에 딸린 밭도 우리를 보고 붙이게 했지. 저 도자기집 가는 길 밑에 엉개나무 심은 밭 말이야.”
“그렇구나. 그러니까 누님말로는 저 산소주인 강씨네가 누님집에 모질게 할 형편도 아니고 저렇게 통행금지간판을 세울 처지도 아니라는 말이군요.”
“두말 하면 잔소리지. 동생 니는 대학까지 나왔다는 사람이 된장인지 똥인지 꼭 찍어묵어봐야 아나?”
“아임더. 사과가 뭔지 능금이 뭔지는 알지요.”
“그 기 우째 다른데?”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능금은 옛날부터 있던 것, 사과는 중간에 들어온 것, 또 열매는 사과열매, 꽃은 능금꽃이라 부르고.”
“외삼촌, 지금 사과가 문제가 아이고 그러니까 저 출입금지 팻말이 지주 강씨집이 아니라 도자기집에서 꼽은 것이란 말이지요.”
“그렇지.”
“그러면 강씨집안하고 의논해서 한 걸까?”
“택도 없는 소리. 그런 의논할 여자도 아니지만 그걸 허락할 강씨집안도 아이다. 옛날부터 밥술이나 뜨는 집은 자기네 선산에 누가 해코지나 할까 싶어 묘사 때 온 동네 아이들 다 불러서 떡을 갈라주고 칙사(勅使)대접을 해서 보내는데 자기들이 사정사정해서 들어온 산소주인이 마실사람들한테 그럴 수가 없다.”
“그런가? 그러면 도자기집 안주인이?”
“그러고도 남을 일이지. 그 동안엔 내하고 마주치면 아는 척은 했는데 집짓는다 말 나고는 늙은 내가 하는 인사도 안 받는다.”
하는데 또식씨의 휴대폰이 울리더니
“외삼촌, 건축허가 떨어졌답니다.”
“그래? 나도 오늘내일 했지.”
“참 신기하네, 일이 되려니까 우째 이래 빨리 되는지?”
“원래 이래 빨리 되는 건데 중간에 든 사람들, 설계사나 누가 늑장을 부리거나 공무원들이 괜한 트집을 잡아서 그렇지.”
“자, 그건 그런데 길이 막혀서 어쩌지? 외삼촌이 알아서 해결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그렇구나.”
“기초는 이미 되어있으니 레미콘만 부으면 골조를 세우는데 당최 레미콘차가 들어올 방법이 있어야지.”
“그러지 말고 다양하게 방법을 찾아보자. 하다못해 누님이 도자기집여자한테 통사정을 해보든지.”
“치아라. 미쳤나? 내가 그 젊은 년한테 쇠를 꼬꾸리게. 내 모래 밭에 쇠를 박고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한다.”
“아따, 할마시 성질도 참!”
하며 열찬씨가 혀를 껄껄 차는데
“엄마, 울산에 임 사장 농막 앞에 대밭이 누 땅일꼬?”
“보나마나 강씨네 산소땅이지. 임시도 측량을 안 해보고 지땅이라고 지은 농막이 말짱 강씨땅이라 안 카더나?”
“그라면 강씨네에 부탁을 할까? 농막 앞에서 한 20미터만 밀어붙이면 외삼촌집 옆의 포장도로까지 연결되는데. 엄마, 혹시 강씨네 전화번호 있나?”
“너거 아부지 죽은지가 언젠데 있을 택이 있나? 있었어도 너거 아부지 죽고 나서 다 태웠을 거야.”
“그라면 우짜노?”
“우짤 기 있나? 그냥 밀어붙여라.”
“나중에 강씨네가 뭐라하면 우짜노?”
“강씨가 아니고 도자기집이 탈이지. 그렇지만 지가 강씨한테 연락하기도 좀 그렇고 해서 우짜면 잘 넘어갈 기다.”
“진짜 괜찮겠나?”
“강씨네가 뭐라카면 내가 통사정을 하고 법에서 뭐라카면 늙은 내가 잡혀가지 뭐.”
그날 오후 또식씨가 바로 대밭을 밀어붙이고 길을 내더니 이튿날 레미콘차가 들어올 때까지 아무 탈이 없었다. 모든 개 열찬씨 말대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박태국 지적과장 말로는 문제의 도로에 아마도 도자기집의 땅이 아주 좁은 부분이라도 들어간 것은 맞을 수 있고 통행을 방해할 목적으로 좀 무리하게 나왔을 수도 있지만 그 또한 담을 쌓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소한 실수라고 변명하면 넘어가 정도일 것 같으니 일단은 그대로 두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며칠 뒤 산16-1임야의 경게측량을 하는데 그 때 문제의 진입로도 별도로 재 측량을 해서 자기들도 골치 아픈 민원 건에 대하여 입장을 정리한다고 했다.
3일 뒤 일요일에 골조가 완성되니 그 때 상량식을 올리자는 또식씨의 연락이 와 영순씨에게 향과 양초, 몇 가지 음식을 부탁하고 컴퓨터를 켠 열찬씨가 상량식 축문을 구상하다 마침내
祝文(축문)
維歲次(유세차), 오늘
서기 2015. 을미년 6월 13일,
경주인 가열찬은 여기 명촌리에 소옥(小屋) 한 칸을 상량하며 백두대간의 정기어린 발얽산 산신(山神)과 이 땅에 살다 가신 선대인의 영령과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아뢰오니
무릇 땅에서 태어난 자 모두 수구초심(首丘初心), 고향을 돌아보기 마련인바 신불산 우러르던 언양을 떠나 낮선 땅 전전하기 근 50년, 비로소 어미의 친정이요, 누이의 시집인 이 곳 명촌리에 작은 전장(田莊)을 마련하고 귀향의 보금자리를 마련함에 있어
햇빛 밝은 이 골짝에서 지는 해와 뜨는 달을 바라보며 미련과 집착을 버려 가족과 화목하며 낮에 밭 갈고 밤에 글 읽는 옛 선비들의 전통을 이어 받아 늘 이웃과 다음 세대를 배려하며 마지막 포부인 글쓰기에도 작은 성과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여기 박주소찬을 올리오니 발얽산 산신과 이 땅에 살다 가신 선대인의 영령과 천지신명께서는 부디 흔쾌히 흠향(歆饗)하시옵소서.
상향(尙饗), 자 드십시오.
열심히 몰두하는 열찬씨를 영순씨가 쿡 찌르며
“또 축문을 쓰네. 하긴 당신 축문을 읽으면 축문이 아니라 구구절절 애절한 편지 같다고 산신제에 참석한 회원부인네들이 탄복을 하더니 이번엔 또 명촌골짝에 누굴 울릴라카노?”
“뭐 특별히 행사처럼 크게 벌리지는 않고 그저 약간의 제물을 올리고 축문이나 읽으면 되는데 내가 쓴 축문을 내가 읽을 수도 없고...”
“하긴. 그 성일씨라고 박장로처남이 그런 걸 잘 할 것 같이 보이던데.”
“그래. 그럼 그러지 뭐. 그런데 음식은 어떻게 준비하는데?”
“일꾼들이랑 형님네 식구들이랑 모두 한 20명 잡고 준비하는데 우선 떡 한 되에 삼색과일이랑 생선 세 마리는 기본이고 잡채랑 돼지고기두루치기를 좀 하지. 총각김치 좀 새로 담고.”
“그래 미혜처형은 도와준데?”
“그날에 맞추어 항암치료도 다 끝낸데.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상가건물 지을 때 보다 더 기분이 좋다고 한 가랑이에 두 다리를 집어넣을 판이야.”
“그래 고맙네.”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