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클리드(Euclid, 기원전 4세기 중반~기원전 3세기 중반)는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원을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천동설을 주장한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와는 전혀 다른 인물)는 알렉산더 대왕의 친구이자 탁월한 장수였던 인물이다. 알렉산더가 죽자 뒤를 이어 이집트를 통치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었다.
유클리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많은 학생을 가르쳤다. 기하학은 당시 학문의 기본이며, 지성을 갖추려면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도 학생이었다. 왕에게는 기하학이 너무 어려웠다. 강의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왕은 유클리드에게 “기하학을 좀 더 쉽고 빠르게 배울 방법은 없겠는가?”고 물었다. 왕인 자기에게 속성 비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유클리드는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There is no royal road to Geometry.)”고 딱 잘라 말했다.
지름길이 없음은 어디 학문뿐일까? 인생 만사에 왕도가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행복은 고사하고 작은 성취라도 자신의 땀 흘림과 공력으로만 가능하다. 땀 흘림과 그 긍정적 결과나 보람의 상관관계를 누구나 안다. 그러나 이 앎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실행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의 『에티카(Ethica)』, 또는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의 마지막 부분은 이러하다.
「정의 42 : 지복(至福)은 덕의 보상이 아니라 덕 자체이다. 우리는 욕정을 억누르기 때문에 지복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복을 향유하기 때문에 욕정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이다.
증명 : (…) 이러한 것들로 안내하기 위해 내가 보여준 길이 당장은 아주 힘들어 보일지라도, 그래도 발견될 수 있다. 물론 아주 드물게 획득되는 것은 필시 힘들 것이다. 지복이 가까이 있고 큰 노력 없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복을 등한시할 수 있겠는가? 모든 훌륭한 일은 드문 만큼 어렵기도 한다.」
훌륭한 일을 성취한 예는 드물다. 왜냐하면 성취하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훌륭한 일은 지복, 아니 소박하게는 ‘행복을 느끼는 삶’, ‘이만하면 살만하다고 느끼는 삶’, ‘보람으로 마음이 따뜻한 삶’, ‘사회의 변혁에도 평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삶’ 등으로 풀 수 있지 않을까?
스피노자가 제시한 지복에 이르는 길은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intellectual love of God)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물론 기독교적인 인격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연)의 무한 본질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그로부터 오는 기쁨과 평온을 지복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마음이 신의 지성 일부로서 ‘영원성’을 누린다고 한다.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모든 철학적 논변이 그러하듯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지복에 이르는 길 역시 형이상(形而上,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형체가 없는 것)이어서 일상의 나침판으로 삼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서구 지성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 받는다. 하여 그의 주장에는 힘이 실린다. 첫째, 인생에서 지복을 획득할 수 있다. 둘째, 다만 성취하기가 어려워서 성취한 예가 매우 드물 뿐이다. 곧, 행복에 이르는 왕도는 없지만, 행복을 성취할 수는 있다는 주장 아니겠는가!
우리 삶에 AI가 훅 치고 들어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관념의 모험’ 자체를 다시 생각게 한다. AI 시대 이전에는 ‘민주주의 공고화’를 넘어 불평등을 해소하고 경제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권을 보장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사회권의 대표적인 예로서는 의료권, 교육권, 적정 주거권, 사회보장권, 노동권 등이다.
사회권 보장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을 채우는 것이다. 기회의 평등뿐 아니라, ‘결과의 평등’까지 실현하려는 인류사적 기획이다.
그러나 AI가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인류의 ‘관념의 모험’은 무의미해진다. 하여 우선 AI 시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AI에 대해서는 박태웅의 『AI 강의 2025』, 한상기의 『AGI의 시대』, 게르트 레온하르트/전병근의 『신이 되려는 기술』, 김덕진의 『AI 2025』 등 여러 권의 저작들을 읽었고, 『듀얼 브레인』 『AGI 시대와 인간의 미래』 『10년 후 세계사 미래의 역습』 등을 읽고 있고, 읽을 것이다.
인생 만사에 그렇듯, AI 시대 대처법에도 왕도는 없다. 왕도는 없지만, 어떤 방법이 왕도적(?)인지는 알게 되었다. 그 핵심은 유튜브 <떠먹여주는 TV>의 ‘인공지능과 일자리 경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사람을 위한 인공지능’에서 박태웅의 강의 내용 중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좀 길지만, 그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물음 : 시대가 바뀌고 너무 복잡한데 AI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가장 필요한 역량은 무엇일까요?
대답 : “AI시대에 꼭 필요한 역량이 뭔가?” 저 또한 질문을 많이 받아요. “우리 애들은 어떻게 하면 되요?” 그런 얘기를 많이 받는데, 제가 그때마다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은요, 뭔가를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이잖아요. 그러니까 궁금한 게 없는 사람은 얘(AI)를 못 씁니다.
물어봐야 되잖아요.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잖아요. 물어보면 뭔가 만들어주잖아요. 그런데 궁금한 게 없으면 물어볼 게 없잖아요. 그러면 이 생성형 인공지능은 나한테 필요 없는 물건이 돼요. 내가 궁금한 게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얼마나 질문을 잘하느냐”, “내가 뭘 모르는지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역량이 돼요.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게 많으려면, 아는 게 많아야 돼요. 주변 지식이 굉장히 풍부해야 돼요. 그러니까 교양이 넘쳐야 돼요. 교양이 있고 주변 지식이 풍부하면, 질문할 게 굉장히 많아집니다. 내가 뭘 모르는지 아는 거죠.
그리고 얘가 답을 했을 때 그 답을 보고 추가 질문을 할 수 있는 공간이 굉장히 넓어져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몇 달 전에 나온 논문의 제목이 “Textbook is all you need”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면, “교과서만 있으면 돼” 이런 내용이죠.
AI를 다루는 논문인데 왜 책 제목이, ‘교과서만 있으면 되지’, ‘책만 있으면 되지‘이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AI를 학습시키고 개발을 하면서 매개변수의 사이즈는 상대적으로 작게 만든 대신에 책과 같은 고품질 학습 데이터를 아주 많이 넣는 거예요.
그랬더니 똑같은 매개변수 크기를 가진 AI라도 책과 같은 고품질 학습 데이터를 더 많이 집어넣어준, 그 비중을 높인 AI가 훨씬 더 똑똑해지더라, 장기기억 능력이 뛰어나고 추론도 훨씬 더 잘하더라는 걸 발견한 거예요.
그러니까 학습 데이터의 품질이 굉장히 중요하다, 생각 밖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고품질의 데이터는 ‘책’이더라. 왜 책이 가장 고품질의 데이터가 될까요? 가령 이게 420페이지(『AI 강의 2025』)이잖아요. 420페이지를 아주 일관된 논리를 가지고 지극히 논리적으로 다 썼단 말이죠.
그러니까 얘를 가지고 공부를 하면, 지극히 논리적인 능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거죠. 장기기억력도 올라가고 추론 능력도 올라가는 거예요. 아무거나 갖고 와서 학습시킨 거랑 책과 같은 고품질의 데이터를 학습시킨 거랑 굉장히 퀄리티(quality) 차이가 나더라는 걸 밝힌 논문이에요.
다시 말해서 AI도 책을 읽으니까 똑똑해지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책을 읽으면 얼마나 더 똑똑해지겠습니까? 그러니까 애들한테 AI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어떤 가장 훌륭한 조언을 하거나 도와준다면 저는 책 읽는 습관을 갖게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논리적일 수 있고, 교양과 주변 지식이 굉장히 풍부해질 수 있고, 그래서 대단히 훌륭한 질문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은 질문이 말도 못하게 중요한 시기예요. 답은 AI가 내주잖아요. “얼마나 훌륭한 질문을 할 수 있니?”, “얼마나 풍부한 주변 지식을 갖고 있어서, 계속해서 질문을 할 수 있니?”, “그 질문의 결과로 굉장히 다각적인 다차원적인 지식을 갖게 되니?”, 라는 게 다 여기 달려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들이 AI시대가 아니라 AI 할아버지 시대가 되더라도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해서 지극히 논리적으로 사고를 할 수 있고 풍부한 교양을 가지고 질문할 수 있게 된다면, 충분히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뭘 해줄까요?”라고 한다면, 저는 책 읽는 습관을 갖게 하는 것, 좋은 책들을 많이 공급해주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 그리고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라, 그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작가/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