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죽고 잡혀가고(3)
이튿날은 전화도 하기 전에
“여보, 내 밍크코트가 생겼다.”
영순씨의 목소리에 은근히 신명이 묻어나는데
“밍크코트라?”
열찬씨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마터면 ‘그놈의 밍크코트!’ 소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밍크코트가 우째 생겨?”
“언니가 주었다.”
“언니라?”
“자기가 죽고 나서 며느리랑 시누이들이 집에 드나들면 아무 것도 줄 수 없다면서 미리 주더라.”
“그래? 그래서 기분이 좋나?”
“모르겠다. 그냥 좀 허무한 것 같다.”
그렇기도 할 것이었다. 사무관에 승진되어 동장사모님이 되어 사무관동기들의 모임인 청우회의 사모님이 되어 오륜대에서 향어 회를 먹고 돌아오던 가을날
“여보, 창피해죽겠어.”
“왜?”
“아홉 명 계원 중 여덟 명이 중형찬데 우리만 소형차야.”
“그렇지만 우리도 차는 있잖아? 당신 나 몰래 운전면허증 따고 운전이 하고 싶어서 나에게 온갖 아양을 떨며 중고차를 사와서 왕비라도 된 듯이 흐뭇해하던 생각이 안 나?”
“나지. 그것도 명색 사무관부인, 동장사모님이 자동차도 없다고 하도 주변에서 부추기는 바람에 하긴 했는데. 사람이 자가용이 생겨서 남의 눈치 안 보고 마음대로 다니니 인생의 격이 달라진 것 같더라.”
사실 사무관모임에서 처음으로 부인네들을 부를 때까지만 해도 차가 없어 돌아오는 길에 부인의 인상이 제일 무던해 보이는 박상재과장의 차로 돌아온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찬바람이 나기 시작하는 다음 모임에 대부분의 부인네들이 밍크코트가 아니면 그에 준하는 메이커의상을 입고 온데 비해 혼자만 얇고 초라한 옷, 거의 평상복에 가까운 옷을 입고 간 것이었다. 그날 입담이 좋아 부인네들의 대화를 주도하는 김정효사무관의 부인이
“남자들이 사무관이 되려면 다문 뒷산에 여우나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나야 된다는 말이 있는데 물론 조상을 잘 만나 좋은 두뇌와 정신력도 타고 났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마누라, 즉 내조가 큰 힘이 되었다는 거지. 여기 사모님들이 하나같이 인상이 좋고 기품이 있지만 내가 보기엔 우리 이동장님의 사모님이 가장 나이도 어리면서도 의젓하고 품위가 있어. 외모만 놓고 보면 가장 촌 빨 나는 우리 동장님이 제일 덕을 많이 본 것 같아.”
까지는 좋았는데 한참이나 식사를 하다 혼잣말처럼
“저 얼굴, 저 몸매에 밍크코트라도 하나 걸쳤다고 생각해보면...”
하는 바람에 영순씨의 얼굴이 발개지더니 돌아오는 길에
“당신 인자 연말에 하는 사무실모임에 내 부르지 마소.”
“와?”
“밍크코트도 하나 없는 사모님이 어데로 간단 말이요?”
“무슨 소리? 우리가 언제부터 동장이고, 사모님이고? 또 자동차 산 지가 언젠데?”
“그놈의 구식 아반떼.”
“당신 와 이라노? 사람이 변한 것 같네.”
“변해야지. 내가 언제까지 동사무소 평직원 가주사의 마누라면 좋겠어?”
“허허 참.”
하고 넘어간 뒤에 시도 때도 없이 밍크코트 타령이었지만 내년이면 슬비가 대학생이 되고 정석이가 고등학생이 되는 판에 꼭 그걸 사겠다는 것 보다는 그냥 항의사마 한번 푸념해보는 정도였다. 그러나 결혼식이나 부부동반행사를 갈 때마다 은근히 신경이 쓰인 열찬씨가
“밍크코트 하나에 값이 얼마나 되는데?”
“그래도 입을 만 한 것은 최소한 돈 천만 원은 있어야 되요.”
“아이구야! 내 몇 달치 월급이야?”
“그래 생각하면 평생 못 사지.”
하고 넘어갔는데 초여름이 되자 곳곳에 창고대방출이니 창고정리니 하면서 밍크코트를 싸게 판다는 플래카드가 나붙고 전단지를 돌리는 바람에 하루는 그 전단지 하나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당신, 이 전단지 보고 최소한의 금액으로 밍크코트를 사려면 얼마가 드는지 알아봐.”
“와? 사줄라꼬?”
“사 주고 안 사주고 간에 값은 알아야지.”
해서 최소한 6백만 원이면 그런대로 입을 만 한 코트를 산다는 것이었다. 그러고서 한 3년이 지난 초여름에
“당신 우선 이 돈으로 밍크코트를 사. 나머지는 당신이 보태든지 할부로 하든지.”
하고 돈 300만 원을 건네자
“이기 무슨 돈인데?”
“잡비로 쓰는 내 수당 아끼고 시집후원금 좀 들어온 것 하고.”
“그래요. 알았어요.”
하더니 이튿날 열찬씨가 퇴근하자 새로 산 컴퓨터를 설치하느라고 슬비, 정석이까지 세 사람이 잔뜩 신명이 나 있었다.
“당신 그 돈으로 컴퓨터 샀나?”
“응. 그 동안 컴퓨터가 없어서 아이들이 집에서 숙제도 못 한다고 하도 아쉬워하는 것 같아서.”
“그래.”
“당신 시도 컴퓨터로 치고 저장하면 더 좋지.”
“아, 알았어.”
그 해 겨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정석이가 서울로 진학하면서 서울부산에서 각각 등록금이 제일 비싼 연세대와 동아대의 등록금과 생활비에 잡비를 대느라고 열찬씨는 다른 점심약속이 없으면 혼자 국제시장 먹자골목에서 혼자 2천 원짜리 칼국수나 짜장면을 먹을 정도로, 영순씨는 제대로 속옷하나 반듯한 걸 못 사 입을 정도로 하루하루 코에서 단내가 난 부부가 밍크코트는 가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슬비가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해 시집을 가고 어학연수에서 돌아온 정석이가 대기업에 취업을 하자 다시 슬며시 밍크코트 문제가 수면에 떠올랐는데
“올 여름엔 꼭 당신 밍크코트를 사자. 내 돈 다시 좀 보탤 게.”
해도
“이적지 없이 살았는데 조금만 더 참지 뭐.”
이상하게 영순씨는 서두는 법이 없었다. 그러고 정석이가 서른 살을 앞두고 결혼이야기가 나오고 열찬씨 또 한 서기관승진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가만히 전화로 오가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오는데 대체로 처녀의 학벌은 좀 그렇더라도 집안이 빵빵하게 잘사는 혼처로 서울의 아파트를 한 채 사주고 승용차를 사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걸로 보아 밍크코트도 자동으로 포함되는 모양 같았다. 서기관에 승진한 열찬씨가 후진에게 길을 열어준다는 명목으로 곧 퇴직하라는 압력을 받을 것 같아 정석에게 웬만하면 앞으로 한 1년 안, 아버지가 퇴직하기 전에 결혼을 하라는 종용을 하자 얼마 후 서울로 올라오시면 결혼할 처녀를 인사시키겠다는 연락이 왔는데 바로 그날로 영순씨가 자리를 깔고 드러누워 버렸다. 상대가 이제 스무 한 살의 고졸출신회사원으로 정석이와 한 직장에서 업무보조를 하는 처녀였다.
대학 다닐 때 사귀고 어학연수 가서 사귀던 그 똑똑하고 예쁜 처녀들은 다 어쩌고 심지어 어학연수 가서 만난 깜찍하고 예쁜 아가씨는 부모들이 몸이 달아 자기네 집안행사에 꼭 와달라고 초청을 하며 일부러 손님에게 사위될 사람이라 소개를 하고 아파트며 자동차를 사준다고 난리를 피웠는데 그 좋은 사람 다 어쩌고 고졸짜리 인턴사원을 택했느냐고 하자 아이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고졸인턴은 곧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정사원이 되니 걱정이 없고 무엇보다 마음이 넓고 성격이 차분해 아버지에게 맞는 며느리라는 것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물음에 그전에 사귀던 명문대아가씨들은 모두들 머리도 좋고 가정도 빵빵하고 인물까지 좋아 영리하고 세련된 것은 좋지만 너무 도시적이고 자기중심이라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고집하는 아버지와 맞지 않을 것 같아 순종형의 아가씨를 택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처녀를 만나보자 키도 훤칠하고 몸매도 튼실하고 행동도 침착하고 말도 예쁘게 해 처녀하나는 나무랄 데가 없는데 가정이 그리 넉넉하지 못해 열찬씨네 만도 못 한 것 같았다. 꼭 거기에 장가를 가야만 하느냐고 항변하는 영순씨보다 너는 나이도 어린 것이 꼭 결혼을 해야 되느냐고 처녀의 엄마도 난리가 나고 처녀의 아버지는 너무나 아깝고 원통하다는 마음에 밤새 울었다는 것이었다.
일단 처녀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이 부산에 돌아온 영순씨가 자리보전을 하고 누웠는데 저쪽에서 몇 며칠을 울던 아버지가 마침내 승낙을 했다는 연락이 왔다. 영신씨, 미혜씨에 영순씨의 친구들까지 암만 처녀가 어려도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정석이 만큼의 신랑감을 만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내어 논 것이라고 영순씨의 불난 가슴에 부채질을 해댔다. 보다 못한 열찬씨가
“당신과 내가 만난 거나 저 아이들의 인연이나 모두 피하지 못할 운명이며 축복인 거야. 배울 만큼 배우고 어질고 현명하다고 소문난 당신이 고작 현실적인 문제로 그 어린 처녀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 성모마리아가 용서를 하겠어?”
하고 어르고 달래어 마침내 결혼이 성사가 되기는 했지만 그 바람에 그 오랜 영순씨의 열망 밍크코트가 날아가고 만 것이었다.
그 후 퇴직한 열찬씨나 정석씨가 한 번씩 이제 밍크코트를 사라고 수차 돈을 주거나 카드를 주어도 영순씨는 이리저리 미루고 사지 않았는데 어찌 보면 밍크코트에 정나미가 떨어진 것 같기도 했지만 사실 영순씨가 그렇게 사치하거나 유행에 민감한 사람도 아니고 또 아무 옷이나 잘 소화시키는 편이라 그리 아쉽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그 오랜 소망이 전혀 엉뚱한데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래. 코트까지 얻었는데 병원에는 자주 가나?”
“날마다 가지. 오죽하면 우리 현서가 암 병동의 귀염둥이가 되었겠나?”
“처형 좋아하는 반찬은 좀 해 가고?”
“해가기는 해 가는데 전처럼 잘 안 묵는다. 속에서 받지를 않은 가 봐.”
“그래 큰일이구나.”
“일요일에 내가 김장하러 촌에 올라가야 되는데 다행히 둘째 승관이가 와서 당분간 병실을 지키기로 했다.”
“동서는 자주 오고?”
“응 날마다 오는데 형부는 얼마나 아푸노, 하고 손을 한 번 잡아주고 언니는 당신 갑갑한데 친구들 만나러 가소, 하고 한마디 던지면 둘 다 더 이상 말이 없다. 한 시간쯤 있다가 형부는 가고.”
“그렇구나.”
“그러니까 당신이 나한테 잘 하고 우짜든동 내가 살았을 때 먼저 죽으소. 형부를 보니 측은해서 죽겠다.”
“무슨 소리? 그건 피차 명대로 사는 거다.”
일요일엔 영순씨와 장모 순란씨의 나머지 두 딸인 영신씨와 영아씨에 며느리 소정씨와 주형이, 지현이, 슬비네 네 식구와 황 서방, 김 서방까지 총 출동해서 전날 밤에 미리 온 영순씨가 열찬씨, 금찬씨 남매와 합동으로 소금물에 담근 배추 120포기를 치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자들이 배추 속을 채우는 동안 걸리적거린다고 쫓겨난 황서방은 톱과 망치를 찾아들고 여기저기 손을 보는데 손에 십자드라이버 하나만 잡으면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하루를 보낼 만큼 취미가 많다고 했다.
열찬씨가 솥에 불을 떼어 돼지수육을 삼는 동안 별 할일이 없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차복씨를
“김 서방, 여기 와서 불 좀 때어 봐.”
하니 처음 때어보는 불이 신기한 아비와 그런 아비가 신기한 아들딸 세 사람이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배추 속을 다 넣자 수돗가와 장독간에 주욱 둘러 앉아
“고기도 많네. 1관도 더 되겠다.”
“엄마, 1관이라 카면 요새사람들이 아나? 1관도 넘는 4키로를 샀다.”
하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걸신들린 사람들처럼 먹어대고 소주도 금방 세병이 날아갔다. 교회를 마친 하숙생 금찬씨도 가세하고 네 살짜리 현서까지 오물오물 잘도 먹었다. 그렇게 회식이 끝나자 그 많은 배추김치, 무짠지, 갓김치를 식구별로 나누는데 장모 순란씨는
“우리 예원이, 혜원이가 김치 아니면 밥을 안 먹어. 우리 주형이, 지현이도 그렇고.”
아들 갑린씨와 막내 영아씨에게 한 통이라도 더 주려고 안달이 났다. 마침내 배분이 다 끝나자
“이건 예서방 형부 줘야겠다.”
따로 김치 한 통을 차에 실은 영순씨가
“당신, 이래 한꺼번에 왔다가 한꺼번에 다들 가버리면 당신이 쓸쓸하겠네.”
영순씨가 애틋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으로 떠나려는데 전화벨이 울리더니
“예. 형부. 언니가 많이 더 안 좋다고요.”
얼굴표정이 심각해진 영순씨가
“저를 찾는다고, 아니 저만 찾는다고요? 알았어요. 안 그래도 형부 김치도 드리려고 가려던 참이었어요.”
하고 운전대에 오르는데
“왜? 처형이 심각해?”
“그런 정도는 아닌데 오늘은 유난히 짜증을 내고 나만 찾는다네.”
“그래? 당신 힘들어서 우짜노?”
“그래도 우짜겠노? 우선 병원부터 들러서 집에 가야지.”
※ 이 글은 고 平里 이득수 선생의 유작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