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1월 9일(토요일)이다. 오늘은 유명한 도시인 ‘레온(Leon)’으로 간다. 어제 이탈리아 아저씨의 심한 기침 소리와 다른 순례자의 코 고는 소리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어제 마트에서 산 과일 등으로 아침을 먹은 후 오전 8시쯤 만시아 공립 알베르게에서 나왔다.
큰 도로로 가기 위해 어제 왔던 길을 되돌아 3분가량 걸었다. 십자가 아래 순례자로 보이는 남녀가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석상이 있다. 남자는 배낭에 손을 넣고 있고, 여자는 옆에 앉아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큰 도로로 나가니 전방 50m쯤 앞에 교회가 있다. 그 위로 하늘이 아름답다. 해가 뜨는 붉은 기운이 구름 사이로 섞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아침 시간이어서인지 마을 길에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 주민들이 집에서 아침을 먹는 시간인 모양이다. 오전 8시 35분,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오전 8시 38분, 다리 아래로 맑은 강물이 흐른다. 도로를 따라 순례길이 이어진다. 도로 옆으로 난 길이지만 역시 오솔길이다. 순례길은 시멘트 길이나 아스콘 포장길보다는 흙길이 어울린다. 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좁은 길 양옆으론 풀이 쭉 푸르게 자라 있다. 그야말로 풀의 미학이랄까, 풀의 존재가치가 드러난다. 도로에도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 발은 흙을 밟으면서, 눈은 쭉 이어지는 풀을 보면서 걷다 보면 생각이 자연스럽게 보글보글 생기는 것 같다. 물론 길에 수시로 나타나는 나무, 오솔길 왼쪽에 있는 밭들 역시 생각에 도움을 준다.
길가의 나무도 가지를 자르지 않아 자유스럽게 자라 있다. 필자는 평소 우리나라 가로수들의 잘린 부분을 보면 늘 잔인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람들의 보행이나 자동차의 원활한 운행을 위해서는 일부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지점에 서 있는 나무들도 어김없이 팔다리가 잘리기 일쑤다.
오전 8시 53분, 왼쪽으론 초록색의 넓은 밀밭이다. 초록의 대지 위로는 잉크색 하늘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 회색빛 하늘이 그만큼 사라진다. 도대체 하루도 같지 않게 하늘을 연출하고 기묘하게 계절마다 이 대지의 색상을 달리 물들이는 힘을 가진 누군가가 있다는 말인가. 가톨릭 종교색이 아주 짙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원시 종교적인(?)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한다는 걸 성직자나 교도들이 알면 필자를 나무랄지 모른다. “아니, 나이 60대 중반을 넘어서는 사람이, 그것도 일간신문 기자를 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양반이 아무리 혼자 하는 것이지만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하느냐!”라고 꾸지람을 들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층위가 많은지를 이제야 알았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 걸으면서 슬며시 웃었다. 나이와 살아온 궤적과는 관계가 없이 아이 같은 유치한 생각부터, 가족과 나라에 대한 걱정까지 정말 생각의 층위가 태산보다 높아 무궁무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TV나 핸드폰의 유튜브를 많이 보기보다는 책을 많이 읽으라고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잔소리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게 길을 걷다 보니 오전 9시 46분, 한 마을에 이르렀다. 주민들이 줄어서인지 상가들이 오래전에 폐업한 듯했다. 마음이 쓰라렸다. 인구가 줄어드는 건 세계적인 추세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스페인의 남부나 중부지방은 덜하다지만 북부지방인 산티아고 순례길 지역은 지대가 높고 주로 산간지방이어서 젊은이들은 모두 떠나고 노인 인구만 남았다가 자꾸 감소하는 것임을 걸으면서 눈으로 보고 있다.
카페 하나 없는 마을을 지나 나무가 많고 길에 낙엽이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 사람이 한평생 사는 길도 이렇다. 물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외로운 길(삶)을 걷기도 하고 모든 게 풍부한 아름다운 길을 걷기도 한다. 누군가가 필자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이 어떻던가요?”라고 묻는다면 “거칠고 좁은 길도 있고, 넓고 아름다운 길도 있고, 진흙탕 길도 있고, 부드러운 흙길도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오전 10시 30분, 작은 강 위에 난 곡선의 다리를 건넌다. 목재 덱(deck)의 다리 위에 만추의 낙엽이 있어 그걸 밟으니 아스라한 마음이 든다. 늦가을의 낙엽과 나무 냄새가 훅 느껴지는 탓인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지 않은가. 하루하루 부딪히는 일상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걷다 보니 모든 감각과 감정이 그대로 다 살아나 있어서이다. 정확히 뭐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스스로 감흥에 젖어 설핏 눈물이 흘렀다.
조금 더 가 도로 아래 돌로 쌓아 만든 아치를 지났다. 오전 10시 34분, 푸엔테 비야렌테(Puente villarente) 마을 표지판을 만났다. 마을로 걸어들어갔다. 오전 10시 47분, 도로변에 카페가 있다. 홀이 제법 넓었다. 밀크커피를 한 잔 주문해 받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마다 주민들이 앉아 커피와 빵, 맥주 등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카페가 도로변에 있어서인지 손님들이 많은 데도 그다지 시끄럽지 않았다. 주민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니 거의 알아듣지 못하지만 표정 등을 볼 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사람 사는 게 대부분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지 않은가.
오전 11시 23분에 카페에서 나왔다. 50분가량 카페에서 있었다. 오전 11시 41분, 다시 순례길로 들어섰다. 들판 길이다. 어느 사이 하늘은 거의 잉크색으로 변해 있다. 잉크색 하늘을 보며 들판 길을 걸으면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은 것 이상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낮 12시 16분, 도로 아래 짧은 터널을 지났다. 낮 12시 50분, 또 마을을 만났다. 아르카우에하(Arcahueja) 마을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길가에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이 마을에 어린이가 많은가?’라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반갑다. 마을을 지나는 동안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낮 12시 57분, 자그마한 창고 벽면에 이 마을 인근의 약도가 그려져 있고, 레온까지 6km 남았다고 적혀 있다. 앞으로 1시간 반 정도 걸으면 오늘의 목적지인 레온에 도착한다.
오후 1시 1분 맞은편에서 자전거를 탄 두 사람이 온다. 필자에게 ”뷰엔 까미노!“라며 크게 말한 뒤 스쳐 지나간다. 들판은 형형색색이다. 하늘색과 어울려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이런 길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묘한 풍광이다. 잉크색 하늘에 흰 구름이 약간 섞여 있어야 더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걷는 사이 오후 1시 23분, 발데라푸엔테(Valdelafuente) 마을 입간판을 만났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공장도 보인다. 역시 이 마을에서도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도로 왼쪽으로 난 순례길을 걸었다. 오후 2시 25분, 저 앞에 큰 마을이 있다. 오후 2시 34분, 푸엔테 카스트로(Puente castro) 마을 입간판이 있다. 마을로 들어갔다. 시골 마을이라기보다는 소도시 같았다. 아마 마을이 레온과 연결돼 있어 그럴 것이다. 오후 2시 57분, 조그만 바(Bar)가 있어 들어갔다. 바 아마이(BAR AMAY)라는 이름이 걸려 있었다. 점심을 먹어야 했다. 커피를 먼저 주문한 후 메뉴를 보니 안주용으로 돼지고기 메뉴 두 가지가 있다. 두 가지를 조금씩 주문하니 빵이 좀 곁들여져 나왔다. 이 정도면 훌륭한 점심이지 않은가. 주로 커피와 빵 한 조각을 먹지만 돼지고기 메뉴가 있으면 무조건 시켜 먹는다. 에너지 보충을 위해서이다. 우리나라보다 가격이 훨씬 싸다. 다 합쳐도 10유로(대략 15,000원)가 되지 않는다. 좁은 바에는 주민들이 맥주 등을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오후 3시 36분, 바를 나왔다. 더 앉아 있고 싶어도 홀이 좁아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줘야 해서다.
바에서 나와 2, 3분가량 걸으니 강 위에 제법 긴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니 입간판에 레온까지 3.7km 남았다고 적혀 있다.
오후 3시 44분, 도로 오른편에 바르셀로나 슈퍼마켓 체인인 메르카도나(MERCADONA)가 있다. 도시다. 나뭇잎이 누렇게 떨어져 있는 인도를 따라 걷는다. 아파트와 제법 높은 건물 등도 지난다. 오후 4시 23분,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교회가 도로 건너편에 있다. 도로 건너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여러 명 서 있다. 오후 4시 27분, 한 여성 순례인이 횡단보도 앞에 서서 핸드폰을 보고 있다. 아마 순례길 표지판이 없어 길을 검색하는 모양이었다. 필자 역시 사거리에서 길이 헷갈려 핸드폰에 설치해 놓은 앱을 보려는 참이었다. 순례인이 돌아보더니 인사를 했다.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순례자였다.
여성 순례자가 먼저 걸어가고 필자는 천천히 걸었다. 오후 4시 28분, 옛 성(城)의 성벽이 나타났다. 남아있는 성벽의 길이만으로도 성의 규모가 컸을 것임이 짐작되었다. 성벽을 따라 걸었다. 오래된 도시였다. 벽체가 돌로 된 집들도 다른 지역보다 크고 튼튼해 보였다. 그렇게 주택가 안으로 계속 걸었다. 오후 4시 32분 마침내 레온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오늘 만시아에서 레온까지 18.8km를 걸었다. 필자의 걸음으로 8시간 30분가량 걸렸다. 생장에서 여기까지는 총 462.2km를 걸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