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년 11월 5일 화요일이다. 아침 7시쯤 일어나 씻고 배낭을 챙겼다. 어제 하루 묵었던 프로미스타(Fromista)의 알베르게 맞은 편에 성당이 있다. 성당 마당이 제법 넓다.
오전 7시 반쯤 숙소에서 나왔다. 아직 어둑하다. 숙소 옆 카페에 가 커피와 햄버거를 주문했다. 순례길에서는 이례적으로 최근에 새로 지은 현대식 카페였다. 마침 어제 알베르게에서 필자에게 라면을 대접한 우리나라의 젊은 부부가 카페에 왔다. 그 부부가 빵 등을 주문하길래 “어제 라면을 얻어먹어 오늘 빵은 제가 사겠습니다.”라며, 감사의 표시로 필자가 계산했다. 부부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라고 했다.
필자는 빵과 커피를 천천히 먹은 후 카페에서 일어섰다. 환경미화원과 아침에 일 나가는 이곳 주민들이 커피와 빵을 먹고 나갔다. 순례자는 필자와 젊은 부부, 그리고 외국인 순례자 한 명뿐이었다.
필자의 동작이 느려 이미 다른 순례자는 먼저 떠났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아침부터 카페에 1시간이나 앉아 있었다. 카페에서 왼쪽으로 걸어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해 도로를 따라 걸었다. 오전 8시 45분쯤 프로미스타 마을이 끝난다는 표지판이 있다. 순례길에는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마을 이름 위에 검은색 사선을 그은 표지판이 도롯가에 일률적으로 있었다. 그 표지판에서 5분가량 더 가니 도로 저 아래로 2차선 도로가 횡(橫)으로 쭉 뻗어있다. 거기서 5분가량 더 걸어가니 철판에 순례자의 모형이 서 있다. 순례자의 모형을 오려내 바깥 부분만 남아 있다. 여기서 1분가량 걸어가니 아래로 양방향의 고속도로가 횡(橫)으로 멋지게 나 있다.
도로를 따라 난 순례길을 걷는다. 오전 9시 34분, 예전에 창고 용도로 쓴 것 같은 건물의 벽에 불그스레한 얼굴을 한 여성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 큰 오리 새끼가 그려져 있다. 그림이 낡거나 훼손되지 않은 걸로 볼 때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곳을 지나니 작은 마을로 연결된다. 저 앞에 순례자 4명이 걸어가고 있다. 4분 정도 그들 뒤를 따라가니 구멍가게 같은 조그만 카페가 있다. 순례자 4명 모두 카페에 들어갔다. 바깥 야외의자에 필자와 몇 번 만난 독일 청년과 그제 숙소에서 봤던 흑인 여성이 앉아 있었다. 40대쯤으로 보이는 그 여성은 성격이 밝았다. 필자를 보고 인사를 했다. 필자도 “안녕하세요?“라고 답례를 했다. 필자는 사교성이 부족해 좀 친숙해져야 이름을 묻는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서로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많이 부러워한다. 아침에 커피를 마셨으나 나중에 카페가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으니 여기서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기로 했다.
주인아저씨에게서 커피를 한잔 받아 바깥 의자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고 일어섰다. 오전에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셔 속이 좀 쓰렸다. 다른 순례자들은 동작이 빨랐다. 또 필자가 가장 늦게 일어섰다. 카페에서 2, 3분 걸었을까? 길가의 어느 집 울타리에 붉은 십자가 문양이 박혀있고, 2층의 벽에는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수소와 달밤에 순례자가 걷는 그림이 마치 동화처럼 그려져 있다. 순례자들을 위해 단장을 해놓은 집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도로를 따라 난 순례길을 걷는 데 앞에 남자 한 명과 여자 세 명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필자가 “실례합니다.”라며,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 걸었다. 그런데 금방 그들이 따라와 필자를 앞서갔다. 다들 걸음이 무척 빨랐다. 오전 10시 53분, 아침에 출발해 만나는 두 번째 마을이 저만치 보였다. 레벤가 데 캄포스(Revenga de campos) 마을이었다. 표지판이 도롯가에 서 있다. 오늘 순례길은 도로를 따라 형성돼 있는 평지이다. 이런 길은 걷기에는 편하지만 좀 밋밋하다. 필자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특히나 순례길은 좀 고불고불하고 오르막 내리막이 있어야 재미가 있다.
오전 11시, 마을로 들어서 걷는데 자그만 공원 같은 게 있고, 그 뒤에 크지 않은 전형적인 마을 성당이 있다. 그 인근에 철로 만든 순례자의 동상이 서 있다. 순례자의 왼쪽 옆구리에 있는 가방에 ‘JACOBEO 2004’라고 적혀 있다. 2004년에 야고보의 형상을 제작해 세워놓은 것으로 짐작되었다.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금방 마을을 벗어났다. 오전 11시 9분, 순례길 옆에 초록색 나무 몇 그루가 있다. 나무의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지만 향나무 종류인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공동묘지이다. 대리석의 무덤 등이 보였다.
그곳을 지나니 왼쪽에는 도로이고, 오른쪽은 농경지이다. 순례길의 중간중간에 산티아고 표지석이 있다. 햇빛이 좋아 점퍼를 벗었다. 오전 11시 21분, 자그마한 나무 십자가를 세워놓았다. 순례길은 계속 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오전 11시 43분 또 다른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은 작아 카페도 하나 없다. 마을 길가의 집을 몇 채 구경하면서 걸으니 바로 순례길로 이어졌다. 순례길은 다시 도로를 따라 쭉 뻗어있다.
낮 12시 12분, 오른쪽 저 멀리 밭에 트랙터가 양쪽에 큰 날개 같은 걸 달고 움직이고 있다. ‘저게 뭐지?’ 궁금했다. 마치 비행기 날개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길을 걸었다. 길가에 시멘트로 포장된 곳이 있어 좀 쉴 겸 앉았다. 햇살을 쪼이면서 앉아 있으니, 오른쪽 밭에서 큰 트랙터가 한 대 나왔다. 손을 흔들어주었다. 운전하시는 분의 연세가 상당히 많아 보였다. 트랙터는 필자 옆을 지나 도로를 따라갔다. 필자가 앉아 있는 곳 옆에 노란 민들레 세 송이가 피어 있다. 필자도 모르게 “예쁘네.”라는 말이 나왔다. 주변에 사람도 없고 도로에 다니는 차량도 거의 없다. 필자는 평소에 아무 데나 앉는 스타일은 아니다. 남을 많이 의식하는 편이다. 그런데 ‘순례자니 이렇게 앉아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를 타고 지나는 사람들도 ‘아, 저 순례자가 피곤해서 길가에 저렇게 앉아 휴식을 취하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10분 넘게 햇살을 쪼이며 퍼질러 앉아 쉬다가 다시 일어나 걸었다. 하늘은 청명했다. 아이 적 마음이 된 것 같았다.
오후 1시 34분, 길가에 하트모양의 꽃이 있다. 아마 순례자들이 지겨워할까 봐 순례길을 관리하는 지역의 행정관청에서 마련해 놓은 느낌이다. 오후 1시 50분, 또 다른 마을이 있고,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마을을 지나니 도로를 따라 순례길이 이어졌다. 오전에 첫 번째 마을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지 않았더라면 허기가 많이 질뻔했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카페가 없었다. 오후 2시 51분, 오른쪽에 초록색 밭이다. 무슨 작물인데 처음 보는 것이니 이름을 알 수 없다. 이어 갈아놓은 밭이 계속 전개되었다.
오후 3시 49분, 오늘의 목적지인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Carrion de los condes)’ 마을 표지판이 있다. 마을에 들어섰다. 오후 3시 51분, 앞에 순례자가 한 명 걸어간다. 많이 쉬었다가 걷는 모양이었다. 왼쪽으로 큰 수녀원이 있다. 오래된 건물 같았다.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수녀원 옆쪽으로 알베르게 입구가 있다. 수녀원 옆 공간을 알베르게로 사용하고 있었다. 알베르게 이름은 산타클라라(Santa Clara)이다. 오후 3시 53분에 알베르게에 도착하였다. 오늘 걸은 거리가 짧고 중간에 카페가 없어 시간을 덜 잡아먹어 일찍 도착한 것이다. 게다가 순례길이 도로를 따라 거의 직선으로 돼 있어 상대적으로 걷는 시간이 절약되었다.
알베르게 마당 안에 철로 만든 구조물이 있다. 예술 작품 같았다. 크지는 않았다. 지붕이 있고 그 아래에 순례자가 걷고 있는 형상이다. 알베르게를 관리하는 분이 나오셨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었다. 2층으로 안내를 받았다. 방에 들어가니 연인인 듯한 젊은 외국인 남녀 한 쌍이 있었다. 침대가 3개 있는 자그마한 방이었다. 2층 침대가 아닌 1인용 일반 침대였다. 방은 전체적으로 안락한 분위기였다. 이 커플과 한방에 잔다는 게 좀 무안하였다. 여태까지 걸은 공립 알베르게 중에서는 가장 좋은 방이었다. 방 안쪽에 침대 두 개가 있고, 필자는 그들 침대와 좀 떨어져 창가에 있는 침대에 배정받았다.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수녀원의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마을이 제법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카페나 바가 있을 것 같았다. 수녀원에서 100m쯤 가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크지 않은 바(Bar)가 있었다. 전형적인 시골의 허름하고 오래된 바이다. 주인아저씨에게 “혹시 식사도 됩니까?”라고 물으니, “간단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셨다. 주민 몇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수프 됩니까?”라고 물으니 “됩니다.”라고 해 먼저 따뜻한 수프를 주문해 먹었다. 식당의 제대로 된 수프가 아니라 아주 간단한 수프였다. 그래도 따뜻한 음식이 속에 들어가니 마음이 펴지는 것 같았다. 수프를 먹은 후 “혹시 고기 요리 있으면 좀 주세요.”라고 했다. 아주 얇은 쇠고기 구운 것 두 점과 감자칩이 나왔다. 메인 음식이었다. 양은 많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먹어보는 식사였다. 대부분 커피와 빵으로 때우지 않았던가. 먹고 나서 “밀감 한 개 주세요.”라고 해 후식을 먹었다. 식사가 썩 좋지는 않지만 다 먹고 나니 그래도 속이 든든했다. 오랜만에 먹은 저녁 식사였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왔다. 씻은 후 자그만 테이블이 있는 식당으로 갔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는 이르고 방에 젊은 연인이 있어 식당 테이블에 앉아 밤 10시까지 책을 읽기도 하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런 후 방에 들어가니 연인은 각자의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필자도 모로 누워 잠을 청했다. 그들이나 필자나 다소 어색한 잠자리였다.
오늘 순례길은 직선도로를 따라 형성돼 걷기는 편했다. 필자는 예민한 편이어서 길의 왼쪽 은 쭉 뻗은 도로여서 좀 산만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이처럼 길이 여러 형태다.
오늘은 프로미스타에서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까지 19.0km를 걸었다. 첫 출발지인 생장에서는 총 367.7km를 걸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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