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울기 전에 이미 잠에서 깨었건만(鷄未鳴時已罷眠·계미명시이파면)
닭이 울자 일어나 앉으니 마음이 아득하구나.(鷄鳴起坐意茫然·계명기좌의망연)
시비와 득실은 천년 있어 온 일이고(是非得失千年事·시비득실천년사)
비태와 영허는 만고에 변치않는다네.(否泰盈虛萬古天·비태영허만고천)
밤기운 청명하여 모름지기 낮을 경계하고(夜氣晴明須戒晝·야기청명수계주)
마음 근원은 맑아서 깊은 못물 같도다.(心源澄澈也如淵·심원징철야여연)
위 시는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의 「닭 소리를 듣고 일어나 앉아서」(聞鷄起坐·문계기좌)로, 그의 문집인 『동계집(桐溪集)』 권 1에 수록돼 있다.
그가 제주도 유배 시기(1614~1623년, 46~55세)에 쓴 작품으로, 청명한 새벽 기운을 받아 또렷해진 그의 정신세계를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위 시에서 동계는 『맹자(孟子)』에 등장하는 야기설(夜氣說)을 통해 자기 수양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야기(夜氣)’란 사물의 생장을 돕는 맑은 기운으로 한밤에 생겨난다. 맹자는 사람에게 있는 인의(仁義)의 마음이 자라도록 돕는 기운을 야기에 비유하면서 낮에 하는 행동을 삼갈 것을 강조했다.
정온은 남명 조식의 ‘경의지학(敬義之學)’에서 중시하는 사회적 실천을 적극적으로 실현한 선비이다. 경의지학은 정온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삶의 가치였다. 4행의 ‘비태(否泰)’는 막힌 운수와 터진 운수. 곧 불행과 행복을 일컫는다. 여기서 ‘否’는 ‘막힐 비’로 읽힌다. ‘영허(盈虛)’는 충만함과 공허함, 곧 번영함과 쇠퇴함을 일컫는다.
후일 인조반정 후에 예조참판에 제수되자 물러나기를 청하는 다음의 소(訴)에서 정온은 경의(敬義)에 대한 인식을 보다 잘 드러내고 있다.
“하늘에 순응하려는 정성은 단지 전하(인조)의 마음속에 달렸을 뿐입니다. 진실로 경(敬)으로써 내면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외면을 바르게 하여 조존(操存)하는 공부가 유독(幽獨)한 가운데 어둡지 않고, 성찰하는 뜻이 수응(酬應)할 때 태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항상 밝게 하여 사욕에 가리어짐이 없고, 이 마음을 항상 경계하여 일예(逸豫)가 싹틈이 없게 하신다면, 전하의 마음은 위로 하늘에 통하고 전하의 덕은 하늘과 부합되어 이미 생긴 재앙은 상서로 바뀌고 변고는 복으로 녹아날 것입니다.”(원문 생략)
필자는 2025년 1월 7일 함께 고전을 공부하는 분들과 경남 거창군 위천면에 있는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의 고택을 찾았다. 마당과 지붕에 눈이 쌓여 있었다. 필자는 10년 만에 정온이 태어난 집을 찾았다. 알다시피 그는 조선시대 참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선비로 일컬어진다. 그러한 선비가 살았던 공간을 찾으면 반듯하고 명징한 정신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 정온이 어떤 사람인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정온의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자는 휘원(輝遠)이고, 호는 동계(桐溪)이다. 1569년(선조2) 경상도 안음현 역동리(현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청리)에서 역양공 정유명(鄭惟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친에게 글공부를 익혔으며, 21세 때 월천 조목을, 32세 이전에 한강 정구의 문하에 출입했으며, 31세 때 내암 정인홍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다. 조목과 정인홍이 각각 퇴계와 남명의 학맥을 이었고, 정구가 두 학파의 조화를 추구한 점으로 볼 때, 정온은 퇴계와 남명의 학문 영향을 두루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정인홍의 문인이 되면서부터 남명 조식의 학맥을 잇게 되었다.
남명 사상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퇴계를 위시한 당대 대부분의 학자와는 달리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한편,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러한 남명의 사상은 정인홍을 거쳐 정온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정온의 삶 곳곳에서 드러나는 의리와 소신의 언관 활동, 강상윤리(綱常倫理) 회복 노력, 그리고 의(義)를 투철하게 실천한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온은 경상우도의 대부분 학자와는 달리 경상좌도의 퇴계 문인들과 적극적으로 교유하고 사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온은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를 도왔고, 1599년 가야산에 가서 정인홍의 제자가 되었다. 정인홍과 갈라져 소북(小北)의 영수였던 유영경이 왕세자 광해군의 즉위를 막고 세자의 교체를 추진하였다. 이에 대북(大北)의 영수인 정인홍은 상소를 통해 유영경을 공박했다. 이 때문에 선조는 정인홍을 유배에 처한다. 이에 대해 정온은 유생의 신분으로 상소하여 정인홍을 옹호하였다. 그 상소 직후 선조는 서거했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정인홍은 유배에서 풀렸고, 정온 또한 출사할 수 있었다. 42세 때인 광해군 2년(1610) 윤3월에 참봉에 제수되어 처음 출사하여, 10월에 별시 을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가 된다. 광해군 3년(1611) 2월 시강원 설서를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614년 정온이 부사직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이에 영창대군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가해자인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선조가 죽은 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영창대군은 평민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고,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도 폐위되었다. 선조가 이미 왕세자로 세운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려고 했기 때문에 정치적 숙청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정온은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혈육(영창대군)을 죽이는, 즉 천륜으로 맺어진 혈친을 해치는 것에 반대하였다. 역모의 혐의가 있는 자를 처단하라고 하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윤리인 충(忠)에 해당한다. 그리고 혈친을 보전하는 것은 가족적 차원의 윤리인 효제(孝弟)에 해당한다. 정온의 인식에서는 충도 중요하지만 국왕으로 하여금 혈육간의 관계를 해치게 하는 것 또한 문제가 있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그의 상소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삼사(홍문관·사간원·사헌부)가 그의 벼슬을 박탈하고 먼 섬에 안치시킬 것을 논하였다. 결국 정온이 46세인 1614년 3월에 옥에 갇히고 6월에 광해군이 친히 국문하였다. 그해 가을에 재차 공초하여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에 정온은 10년 동안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정온은 다른 유배인들처럼 제주도에서 갖은 질병과 풍토병 때문에 매우 고생하였다. 그의 여러 시와 편지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가 유배 시기 지은 시 「병중에 애써 읊다」(病中苦吟·병중고음)에서 “죄 많은 몸에 온갖 병이 찾아드니(萬死殘骸百病功·만사잔해백병공)”/ 허한 속에 감기까지 앓아서 날마다 야위어 가노라.(“中虛外感日枯容·중허외감일고용)”(『동계집』 권 1)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지 않고 유배 생활 동안 끊임없는 학문 수양에 몰두한다. 유배 시기 정온은 제주도에서 시와 편지 등 많은 글을 남겼고, 여기에는 그의 꼿꼿한 선비로서의 사유가 풍성하게 담겨 있다.
정온은 1610년에 출사한 이후로, 광해조에 폄직·유배 등으로 고난의 세월을 보냈고,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西人) 집권 세력들과 의견을 대립하였다. 게다가 두 차례의 호란을 겪느라 안정된 환경에서 학문에 침잠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0년이라는 제주 유배 기간에 정온은 나름대로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으며, 많은 양의 한시와 다양한 글들을 남김으로써 학자로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1623년(55세)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자, 정온이 제주도 유배에서 해금되어 다시 정치에 복귀하였다. 이후 정온은 여러 관직을 거치며 정치활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남인계열의 소수파라는 한계로 정치적 성과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문집인 『동계집』은 두 차례 간행되었다. 초간본은 동계의 손자인 정기수(鄭岐壽)가 가장(家藏)의 초고를 수집·편차하여 미수 허목의 발문과 용주 조경의 서문을 받아 1660년경에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철종 3년(1852)에 다시 간행되었다. 시는 원집에 349제, 속집에 170제로 모두 519제(554수)가 남아 있다.
동계는 남명의 경의지학에서 중시하는 사회적 실천을 적극적으로 실현한 선비였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때문에 무너진 강상윤리를 회복하려고 애썼던 왜란 직후의 활동, 폐모살제(廢母殺弟)에 강력히 저항했던 광해군 초반의 활동, 청나라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 강력한 척화론을 제기했던 호란의 활동 등은 모두 적극적인 의(義)를 실천한 결과이다. 그리하여 제주도 유배는 그가 목숨을 걸고 충언(忠言)을 한 결과에 기인한 것으로 척화의 주장과 함께 그의 사상을 가장 강력하게 실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동계는 제주 유배 시기에도 끊임없이 경(敬)을 실천하는 지경(持敬) 수양에 매진했다. 이는 유배라는 억압된 환경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인간의 본성이나 욕망, 도리(道理)의 문제와 같은 문제에 고민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온의 생애를 관통하는 사상의 정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정온은 조선조 일반 유자와 같이 은거할 때는 지경에 대해 깊이 탐득하였고, 벼슬에 나갔을 때는 의리정신으로 충간하여 군주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는 또한 제주 유배 생활 동안 사우(四友)인 매화·소나무(난초 대신)·국화·대나무를 심어 길렀다. 그러면서 이 사우를 통해 지경의 자세를 유지했으며, 사우의 지조와 절개를 자신과 동일시 해 어려운 환난을 극복하는 동인으로 삼았다.
이러한 정온의 곧은 절의와 절개는 귤림서원에 ‘제주 오현(五賢)’으로 배향됨으로써 숭모되었다. 제주 5현은 동계 정온을 비롯하여 충암 김정, 우암 송시열,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이다.
정온의 적거지였던 대정현에는 정온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 세워졌다. 이 사당은 1843년(헌종 9)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원조가 「송죽서원(松竹書院)」이라는 현판을 써서 걸어주었다. 송죽서원의 이름은 정온의 시 「제주목사 성안의(成安義)와 이별하면서 준 시」(贈別濟州牧使成安義·증별제주목사성안의, 『동계집』 권 1)에서 취하였다고 한다. 이때는 정온의 적거지였던 대정에 추사 김정희가 유배 중이었다. 송죽서원의 제액을 추사가 썼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여하튼 추사는 정온을 경모하였다고 한다.
추사는 시 「우연히 짓다」(偶吟·우음)에서 “송죽의 굳은 절개는 동쪽 문의 사당에서 기리는 구나(松竹勁節東門祠·송죽경절동문사)”라고 표현하고 있다. 동쪽 문의 사당은 정온을 기리는 사당을 말한다.
또 추사는 유배가 끝난 후 정온 고택을 방문하여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정온 선생의 높은 학덕과 절의와 곧은 품성을 칭송하는 제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귀양에서 돌아와 이 현판을 써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병자호란 때 끝내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정온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1638년 덕유산의 모리(현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 은거하였다. 모리는 인적이 드문 골짜기로, 정온은 이곳에 풀을 엮어 집을 만들어 ‘모리구소’(某里鳩巢)라 이름을 붙였다. 낙향한지 3년 만인 1641년에 73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정온의 후손이 살고 있는 고택의 뒤채까지 둘러본 후 나오면서 본채 중간에 있는 ‘충신당’ 현판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평생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며 ‘의롭게’ 살아간 참된 조선의 선비 정온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하였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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