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바날 델 카미노' 알베르게에서 아침 7시 45분쯤 나와 교회 옆을 거쳐 마을 길을 걷는다. 아직 날이 완전 밝지 않다. 사진= 조해훈
오늘은 2024년 11월 14일 목요일이다. 아침 7시 45분쯤 알베르게에서 나왔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안경을 찾으니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침대 아래까지 뒤졌다. 어쩔 수 없이 안경 없이 그냥 나왔다. 아직 바깥은 어두웠다. 교회 옆길로 천천히 걸었다. 집과 교회, 모든 건물은 돌을 쌓아 지어져 있다.
어제 같은 방에서 잤던 스페인 바르셀로나 남자(오른쪽)와 마을 카페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덟 번째 걷는다고 했다. 사진= 다른 순례자
아,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카페가 있고 불이 켜져 있다. 이 조그마한 마을에 순례자가 몇 명이 찾아왔던 관계없이 해당 관청이든 카페 주인이 그렇게 생각했건 간에 굶긴 채 보내지 않으려고 배려한 것 같았다. 오전 8시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와 빵 한 조각을 주문해 먹었다. 지난밤 함께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아저씨가 필자보다 늦게 카페에 들어와 앞 테이블에 앉으며 인사를 했다. 알베르게에서 필자에 앞서 샤워하고 팬티만 입고 거실로 나왔던 남자다. 필자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필자가 물었다. “저는 바르셀로나에서 왔습니다.”라고 남자가 답했다. 커피와 빵을 먹으며 몇 마디 주고받는 가운데 남자가 “저는 산티아고 순례길 지금 여덟 번째 걷는 중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스페인 국민이라고 해도 산티아고 길을 여덟 번째 걷는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라바날 델 카미노' 산골 마을의 집들이 이처럼 오래된 돌집이다. 사진= 조해훈
필자가 “여덟 번이나 걷는 이유가 무엇인지요?”라고 물었다. 남자는 “신앙 차원에서 처음에 걸었는데 그 뒤에 한 번 더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저 자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다음에 또 걸으니 다른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여하튼 걸을 때마다 다른 생각들이 자꾸 나더군요. 그게 신기해 한 번 더 걷고 하다 보니 여덟 번째 걷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필자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아 조심스레 물어봤다. 남자는 “저는 1961년 생이고 이름은 예수입니다.”라고 말했다. 할아버지처럼 보이는데 필자보다 한 살 적었다. 남자는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리하여 다른 순례자에게 부탁해 사진을 함께 찍었다.
사진을 찍고 나자 알베르게 주인아저씨가 카페에 들어와 필자에게 “안경을 두고 가셨더군요.”라며 안경을 건네주었다. 알베르게에 잠을 잔 순례자가 다섯 명밖에 되지 않은 데다 안경을 낀 사람이 필자와 남아공에서 온 순례자뿐이었으니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필자는 고마워 “정말 고맙습니다. 커피 한잔 드세요.”라며, 알베르게 주인아저씨에게 커피를 주문해 주었다. 이름이 예수라는 남자는 그러는 사이 먼저 나갔다. 알베르게 주인아저씨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오전 8시 50분에 카페를 나왔다. 카페에 50분 동안 앉아 있었다.
완만한 오르막길이 산 능선으로 이어졌다. 사진= 조해훈
카페 바깥으로 나오니 날이 환하게 개어 있다. 마을은 집이 몇 채 되지 않아 금방 벗어났다. 오래된 돌집으로 구성된 산골 마을이어서 마음이 애잔했다. 거의 사람이 살지 않은 듯했다. 카페와 미니 슈퍼마켓은 순례자들을 위해 관청에서 배려한 것 같았다.
오를수록 안개가 자욱했다. 사진= 조해훈
지대가 제법 높은 느낌이 들었다. 초겨울 날씨인 데다 나무며 하늘이 약간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산맥을 걷는 것 같다. 산의 정상을 따라 걸었다. 작은 돌들이 발에 밟히는 오르막길이 좀 이어졌다. 지대가 높아서인지 날씨가 추워서인지 하늘색이 달랐다. 잉크색이 아니다. 다른 순례자들은 빠른 걸음으로 먼저 가버려 혼자서 산길을 계속 걸었다. 추워 모자를 쓰고 그위에 바람막이 옷의 모자를 덮어썼다.
젊은 남녀가 큰 개를 데리고 필자 옆을 지나 앞서가고 있다. 사진= 조해훈
오전 10시 6분, 돌의자와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러지 않아도 추운데 돌의자에 앉으면 더 추울 것 같아 그냥 걸었다. 계속 오르막이다. 산길이라 그런지 바닥에 돌이 많이 걷기에 더 불편했다. ‘이럴 때 함께 걷는 동반자가 있다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뭇가지에 허연 이끼가 붙어 있다. 독특했다. 계속 돌길의 오르막이다. 오전 10시 42분, 산악자전거를 탄 남자가 필자 옆을 지나 앞서 오르막을 오른다. 대단한 사람이다. ‘저렇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자전거로 완주하고 나면 다리 근육이 많이 불어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휙 지나가는 사람이지만 반가웠다.
갈수록 안개까지 끼어 앞이 흐릿해진다. 좀 무서움이 들었다. 이런 길에서 산짐승이라도 만난다면 어쩔 것인가. 오전 10시 56분,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젊은 외국인 남녀가 세퍼드 같은 큰 개와 함께 뒤에서 다가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비켜주니 인사를 하며 앞서 오르막을 오른다. 그 사람들의 걸음이 엄청 빠르다. 필자도 뒤처지기보다는 그들 뒤를 따라가려 좀 걸음 속도를 냈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안개 저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폰세바돈 마을의 카페 입구. 사진= 조해훈
오전 11시 2분, ‘폰세바돈’(Foncebadón) 마을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마을이 있으면 카페가 있겠지?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마시면 좀 덜 추울 것 같아’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가니 안개 속에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아마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일 것이다. 마을 방향으로 걸어가니 길 한 가운데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안개 속에 집이 보였다.
날씨가 많이 추워 카페에서 파는 털모자를 사 쓰고 뜨거운 차를 우려 마시고 있는 필자. 사진= 카페 주인아저씨
오전 11시 10분, 마치 우리나라 산골의 굴피집 같은 인상을 주는 작은 카페가 있다. 속으로 감사했다. 카페에 들어가니 털모자를 팔았다. 크기가 약간 작았지만 하나밖에 없어 얼른 샀다. 10유로였다. 마침 차(茶)를 팔았다. 차가 커피보다 더 뜨거울 것 같아 차를 주문했다. 구석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는데 주인 남자가 “사진 한 장 찍어드릴까요?”라고 했다. 필자는 “고맙습니다.”라며, 핸드폰을 건넸다. 따스한 모자를 쓰고 뜨거운 차를 마시니 훨씬 덜 추웠다. 카페 내부도 춥지 않았다. 차를 다 마시고 나서 뜨거운 물을 더 달라고 해 더 마셨다. 그렇게 한 시간을 앉아 몸을 데운 후 낮 12시 3분에 카페에서 나왔다. 그새 안개도 걷혔다.
폰세바돈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 사진= 조해훈
털모자를 쓰고 바람막이 점퍼의 모자까지 덮어쓰니 덜 추웠다. 3분 정도 걸으니 알베르게가 있다. 집이라곤 네댓 채 될까 말까 한 높은 산간 마을에 알베르게가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아마 순례자들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 일 테다. 혹시나 추운 겨울에 조난당하는 순례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럴 것이다. 여하튼 관계 당국의 배려가 고맙다.
순례길의 고도가 높아 다른 산들이 아래로 쭉 펼쳐져 있다. 사진= 조해훈
알베르게를 지나 다시 산길을 걸었다. 산악지대를 걷는 기분이 절로 났다. 낮 12시 13분, 저 아래에 허물어지고 거의 뼈대만 남은 건물이 하나 있다. 종이 걸려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이 있어 아마 교회였던 모양이다. 오랜 동안 저 교회에 인근의 사람들이 와서 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하였을 터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살지 않아 마을이 없어지자 교회도 마침내 저렇게 기능을 상실하고 허물어져 있으니 마음이 아프다.
순례길 바닥에 돌이 많아 걷기에 다소 불편했다. 사진 = 조해훈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뒤에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덩치가 큰 흑인 순례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인사를 건네니 그도 인사를 하며 필자르르 앞질러 갔다. 오늘 제법 험하고 을씨년스러운 길을 걷는데 그래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많이 힘들지는 않지만 계속 오르막이다. 필자는 가끔 우리나라 순례자들이 “길이 너무 험하고 힘들다.”고 말하면 “지리산 종주를 해보셨습니까”라고 물어본다. 그러면서 “지리산 종주를 한 사람이라면 세계 어느 산에 가더라도 가뿐하게 갈 수 있다.”라고 말한다. 지리산은 오르막 내리막이 심하고 바위가 많아 걷기가 쉽지 않다. 그리하여 지리산에 비하면 이런 오르막길은 평탄한 편이다.
순례길 옆 나뭇가지에 이끼가 앉은 모습. 사진= 조해훈
길은 산 정상을 따라 이어진다. 길옆 숲에 또 나뭇가지에 이끼가 많이 앉아 있다. 저 아래로 산들이 쭉 이어져 있다. 스페인 북부 산맥구간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하늘은 겨울날 흐릿한 하늘처럼 그렇다. 비가 오려는 하늘과는 다르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있다. 사진= 조해훈
만하린 마을에 있는 허름한 카페. 여기서 커피와 달걀 한 개를 먹었다. 사진= 조해훈
낮 12시 36분, 산티아고까지 236.6km 남았다는 표지석이 있다. 이렇게 대충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알려주니 반갑고 고맙다. 낮 12시 47분, 산악도로인가? 왕복 2차선 도로가 있고, 저 앞에 십자가가 높게 세워져 있다. 걸으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산골일수록 종교적인 색채가 짙음을 느낀다. 스페인은 역사적 부침이 심했던 나라이다. 그리고 가톨릭에 대한 신앙이 그 어느 나라보다 깊었던 나라이다. 중동지역의 이슬람인들이 스페인을 장악해오자 스페인은 십자군전쟁에도 참전하지 못할 정도로 이슬람교도들과 전쟁을 치르지 않았던가? 이사벨 여왕이 결국 이슬람인들을 물리쳤다. 그 흔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알함브라궁전이 있다. 그리하여 삶과 종교가 일치되었던 산골 사람들이 의지할 데가 종교밖에 없었으리라.
만하린 마을 카페에서 필자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주인아주머니가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사진= 조해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온갖 생각을 다 할 수 있어 필자는 그게 좋다. 다음 기회에 다시 온다면 ‘예수’라는 바르셀로나 남자가 말했듯이 필자에게도 또 다른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마을의 집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사람이 살지 않고 있다. 마을이 사라진 것이다. 사진= 조해훈
길 아래로 펼쳐진 초지에 소가 한 마리도 없다. 사진= 조해훈
길은 좀 험하지만 이제 내리막길이다. 사진= 조해훈
돌이 많은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사진= 조해훈
낮 12시 49분, 이 산악지대의 지형에 대해 설명해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길은 다시 오르막이 이어진다. 바닥에 돌이 많이 걷기에 다소 불편하다. 언제 비가 내렸는지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다.
오후 3시 56분, 저 아래에 마침내 오늘의 종착지인 '엘 아세보' 마을이 보인다. 사진= 조해훈
'엘 아세보' 마을회관. 사진= 조해훈
오늘 묵을 알베르게 입구. 카페와 숙소를 겸하고 있다. 사진= 조해훈
오늘은 라바날 델 카미노에서 ‘엘 아세보 데 산 미구엘’(El Acebo de San Miguel)까지 16.9km를 걸었다. 고도는 1,146~1,512m였다. 생장에서는 총 548.4km를 걸었다.
알베르게의 카페 내부. 맨 오른쪽에 앉아 있는 남자와 그 옆에 작은 사람이 그의 아내인 이태리 부부. 빨간 옷 입은 남자도 순례길에서 만난 이태리 사람이다. 사진 = 조해훈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