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39 여름과 가을 사이 - 가지 많은 나무에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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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0 13:28 | 최종 수정 2021.08.22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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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지나간 오전 서둘러 산책을 나가 제가 가끔 들리는 이이벌마을 만당정이라는 정자 뒤에 있는 느티나무를 찾아갔습니다.
가끔 마초를 데리고 산책을 가는 성황목(城隍木)인데 수세도 좋고 수형도 좋아 정자에서 바라보면서 쉬고 왔는데 지난 번 병원의 검사결과가 안 좋게 나오자 문득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또 옛날 우리 어머니가 냉수를 떠놓고 아침마다 아들 셋이 잘 되기를 빌던 심정으로 제발 저를 좀 낫게 해주면 착하고 열심히 살겠다고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손뼉을 치며 나무둘레를 한 50번 돌고나면 절로 가슴이 뿌듯하며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글줄이나 읽었다고 무신론자를 자처하다 다 늙어 토템신앙을 가진 셈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직 바람이 사나운 들판에 홀로 선 거대한 나무를 보자 문득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밑에 여남은 개 가지가 부러져 흩어지긴 했지만 몇 백 개도 넘을 가지들을 고스란히 부여안고 꿋꿋하게 잘도 버티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둘레 돌기를 마치고 합장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정초에 당산제를 지낼 때 초를 켜는 자리에 웬 족도리풀 한 포기가 기생해도 아무 타박을 않고 조용히 보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별 공로는 없이 부지런히 빌기만 하는 저나 마초도 어쩌면 저 많은 가지 중의 하나로 받아줄 것만 같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위기의 남자가 된 저는 이제 저 무성한 나무의 작은 가지, 아니 바람의 작은 가지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다 들면서 말입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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