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43 여름과 가을 사이 - 죽은 감나무가 싹을 틔우다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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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5 18:38 | 최종 수정 2021.09.03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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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에 입은 피해 중에 가장 심각하지만 차마 남에게 말을 하지 못한 것은 대추나무가 우지직 중동이 부러져 속수무책으로 죽어버린 점입니다.
그 대추나무는 재작년 가을 누님 집을 고쳐지으며 울타리서 뽑아버린 것을 제가 주워 심은 것입니다. 그러나 늙은 나무라서 그런지 이듬해 봄에 뜨락의 모든 나무들이 다 잎이 나고 활착을 할 때 도무지 새싹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 늙어 시집을 간 셈이니 적응이 힘들었겠지요. 그래도 애써 옮겨 심은 게 아까워 그냥 두었습니다.
작년 6월 제 몸의 곳곳에 암세포가 번져 이제 매우 힘들다는 의사의 진단으로 항암제를 먹으며 전전긍긍할 때입니다. 무쇠 솥도 녹인다는 8월의 폭염 속에서 문득 그 늙은 대주나무에서 싹이 돋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마치 늙은 주인 제가 다시 소생(蘇生)할 암시이기나 한 것처럼 사진을 찍어 포토에세이에 올리고 애지중지하던 <희망의 나무>인 것입니다.
그 소중한 나무가 올해는 묵은 나무답게 엄청 대추가 많이 열려 추석이면 대추 한 말은 너끈히 따겠다며 누님과 아내가 기뻐했지요. 그 소중한 나무가 하필이면 제가 다시 몸이 나빠져 약도 바꾸고 방사선치료를 받으며 잔뜩 풀이 죽은 시점에 동강이가 나다니 말입니다.
사람이 너무 소심하면 안 된다, 설령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제 의연해야 될 나이가 아니냐며 자위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여 마침내
(그래, 아직 뿌리가 살았으니 내년 봄에 새순이 돋을 거야. 다시 새봄을 기다리는 거야.)
하고 애써 마음을 달래는 어느 날 아내가
“여보, 죽은 감나무에서 싹이 났어!”
희색이 만면했습니다. 아마도 제 심정을 간파한 모양이었습니다.
사실 그 감나무는 지난겨울 생가마을 친구가 조합장으로 있는 울산시 산림조합의 매장에서 곶감을 깎고 홍시를 담기 좋은 토종 참감나무 5년생을 거금 4만 원이나 주고 사온 것입니다.
올해 가을 홍시를 열릴 것을 장담했는데 외톨밤을 벌레가 먹는다고 유독 그 귀한 묘목이 싹이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을에 고사목사진을 찍어오면 다시 묘목을 주겠다고 해서 그냥 세워둔 것인데 뜻밖에 이 염천에 싹이 난 것입니다.
삶이란 것이 어차피 길흉화복이 교차하는 새옹지마(塞翁之馬)겠지만 어쨌거나 제 마음이 가장 허랑할 때 기가 막힌 반전(反轉)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마도 사나운 폭우가 잠든 나무의 생명력을 깨운 것이겠지요. 저는 다시 용기를 내어 내년 가을 쯤 홍시가 열리고 곶감을 깎는 날을 기대하며 희망으로 아침을 맞을 것 같습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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