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38 여름과 가을 사이 - 부용화꽃 빛깔로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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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0 12:58 | 최종 수정 2021.08.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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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참으로 고운 꽃이라고 소개한 우리 화단의 부용화가 여름이 다 지나도록 한 달 이상을 버티고 있습니다.
쉬지 않고 꽃이 피기는 하지만 대부분 금방 져버리는데다 두 노인네가 사는 호젓한 집에 산뜻한 활기를 불어넣던 허수아비들마저 장마에 칙칙해지는 판에 마치 분홍빛 휘장을 친 듯, 선홍빛 조명등을 달아놓은 듯 화용월태(花容月態)를 뽐내는 부용화의 풍만(豐滿)한 아름다움이 이제 성숙을 넘어 난만(爛漫)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마치 그리운 사람을 두고 떠나는 여인이 뭔가 한 마디 하려 입술을 달막거리다 애써 그만 두는 그 처연한 빛깔 같기도 한 꽃잎과 하얗고 간 나팔형태 꽃술의 연약하고 안타까운 모습과 손을 대면 금방 주홍빛 물감이 배어나올 것만 같은 모습...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에서 다 늙은 떠돌이사내가 군 부대 앞 술집에서 '긴 밤'이 싫어 도망가는 처녀를 보고 평생 처음 남을 도와주며 밤새 눈밭을 걸어 한적한 간이역에서 고향마을로 가는 기차표를 끊어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처녀는 오래 전 집을 나온 후 자기의 마지막 비밀이자 재산이며 자존심인의 본명이 순이라는 걸 가르쳐 줍니다.
그러자 그 늙은 떠돌이는 인간의 한 평생이 무슨 색깔이냐고 물으면 아마도 방금 서산에 해가 떨어지는 저녁노을 같을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긴 듯 짧은 듯 허위허위 살다가는 길, 만약 열명길의 저에게 누가 자네는 어떤 빛깔로 한 세상을 살고 왔냐고 묻는다면 저 역시 저 부용화의 꽃잎처럼 선연한 노을빛으로 살다왔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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