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35 여름과 가을 사이 - 하얀백일홍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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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3 10:25 | 최종 수정 2021.08.20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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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여 보통 개화기간이 10일을 넘기는 꽃이 없는데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무려 100일간을 피어 백일홍이라고 불리는 꽃이 바로 배롱나무입니다. 우리 어릴 적에는 꽤 알아주는 집안의 그럴 듯한 무덤가에 한두 그루가 있는 정도로 몹시 귀했는데 선홍색 꽃도 곱지만 희고 매끈한 등걸이 너무 날렵해 노천명이 시에 나오는 사슴처럼 몹시도 귀한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고속도로와 국도가 개통되고 웬만한 도시에는 공원이, 또 가로에는 소공원이 많이 조성되어 언제부턴가 저 선연한 분홍빛 꽃은 길가와 공원에 가장 흔한 조경수가 되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 가친께서 몸이 불편해 중학생시절부터 지게질, 쟁기질을 배워 농사꾼, 나무꾼의 투 잡에 종사했는데 아버님의 컨디션이 좋은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군사정권의 지붕개량과 농로개설이사업에 의해 리어카길이 뚫린 진장의 밭둑에서 당신이 돌아가시면 사람들의 내왕이 많은 이곳에 묻어 평소에도 사람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고 명절 때는 많은 후손이 찾아오되 무덤가에 꽃이 붉고 둥치가 미출미출 매끄러운 백일홍을 심어주라고, 그 묘목은 덕천고개에서 언양여상 뒤를 거쳐 버든사람들이 간월산에 나무하러가는 작천정 좀 못 미쳐 지게바탕이 되는 큰 무덤가에 가면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함박눈이 내리는 날 돌아가셨습니다.
하얀 눈을 쓸어내고 붉디붉은 황토흙을 파고 아버님을 장사지낸 이듬해 봄에 저는 아버님 말씀대로 배롱나무를 구해다 심어 선연히도 붉은 꽃이 피었는데 무덤가로 난 새 길이 수남, 마산, 작하, 가천, 신복, 상천등 삼남면 방면에 사는 중고등학생의 등굣길이라 그런지 꽃이 피기 무섭게 꺾어지고 없어 두해를 연속 실패하고 제가 부산으로 나올 때는 코스모스로 바꾸었는데 가끔 산소에 가면 그 가녀린 코스모스와 고추잠자리의 아련한 슬픔이 매번 눈물을 돋우곤 했습니다.
물론 명촌별서에도 배롱나무를 심었습니다. 벌써 두 번이나 약 한 달간을 버티던 꽃이 지고 세 번째 꽃이 다시 빨갛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새는 보라 빛의 개량종도 흔히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산책길에 뜻밖에도 70평생에 듣도 보도 못한 하얀 백일홍을 발견했습니다. 개량종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아주 귀한 돌연변이 희귀종일수도 있습니다. 주홍색과 흰빛의 백일홍을 올립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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