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29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 뚜깔 불던 가시나들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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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6 15:53 | 최종 수정 2021.08.1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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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우리 집 화단을 제일 먼저 붉게 물들인 화초가 저 화려한 꽈리 꽃입니다. 언제 꽃이 피었는지도 모르게 한 여름 장마 속에 새파랗고 동그란 알맹이 하나를 감싼 만두 모양의 파란 주머니에 어느새 저렇게 화려한 주홍빛이 내려앉은 것일까요?
우리 어릴 적 언양 사람들은 저 꽈리를 뚜깔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꽈리가 귀해 제대로 된 뚜깔을 부는 여자애들은 귀했고 통밀이나 담쟁이덩굴 열매 같은 걸 씹어 껌도 만들고 뚜깔 비슷한 것도 만들어 분 것 같습니다.
6·25전쟁 전후에 겨우 50호가 좀 넘는 우리 평리부락의 버든마을 웃각단과 아랫각단, 진장과 구시골에서 무려 스물다섯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으니 두 집에 하나 꼴인 셈인데 그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 농사꾼 우리 부모님들의 천부적 번식본능인 것 같습니다. 거기다 성비가 18:7로 사내아이가 훨씬 많은 것도 재미있고요.
그 때 밀껌을 씹고 뚜깔을 불던 또래 가시나들은 머시마와 마찬가지로 소매가 없는 난닝구에 제대로 치마를 갖춰 입은 아이는 드물고 하나같이 놋그릇 주발뚜껑 모양의 ‘깨뚜뱅이머리’라는 깡총한 단발머리를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일찍 고향을 떠나 다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영선이, 순옥이, 인선이, 해숙이, 덕숙이 뭐 그런 정도인데 영선이, 순옥이는 다 늙어서도 가끔 만나니 곱게 늙은 모습이 새삼 반갑더군요. 추석 대목이 되니 같은 마실 아이들 하고 같이 놀던 시절을 떠올리며 제가 쓴 시 한 편 올립니다.
동두깨미 살림
찬식아, 순옥아, 영선아,
동두깨미 살림에도 애 살이 많아
제일 예쁜 조갑지 살강에 엎어놓고
돌미나리 김치, 제비꽃씨 쌀밥에
엄마도 되고 각시도 되고
아기도 되고 신랑도 되던
돌담과 징검다리 사라진 마을에
그 중 아쉽고 안타까운 건
고속도로 따라서 세월이 달려간 것.
추물 무친 강아지풀에 속아 잡히던
세상은 개구리처럼 만만찮아
우리 늙은 얼굴 민망하지만
한 움큼씩 후두둑 날아가던
수수밭의 참새처럼 재잘대면서
언양 장날에 일요일 끼면
소전거리 골목에서 우리 만나자
발 빼고 가재나 잡아 보든지
동두깨미 살림 한 번 살아보든지.
※동두깨미: 소꿉
추물 무친 : 침 묻힌
발 빼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물을 건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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