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24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 바위고개 언덕의 패랭이꽃

이득수 승인 2021.08.06 15:52 | 최종 수정 2021.08.08 11:03 의견 0
패랭이꽃

가장 아름답고 한국적인 야생화를 찾으라면 저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패랭이꽃을 꼽을 것입니다.

우리 어릴 적 물떼새가 겅중대는 강변의 자갈 틈에 둥지도 없이 낳아놓은 자갈색의 새알을 찾다 문득 선홍색, 또는 분홍색의 패랭이꽃을 발견하면 그만 가슴이 찡해지곤 했습니다. 채송화처럼 납작 엎드린 조그만 꽃송이가 마치 도화지에 물감을 엎질러놓은 것처럼 번져나갈 때 물떼새의 울음소리라도 들리면 왠지 서러운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패랭이꽃을 다시 만나는 곳은 진장골짜기를 올라가는 가파른 바위언덕의 석비늘밭(풍화되어 떨어져 나온 작은 돌조각들이 모인 곳)이었는데 해마다 같은 자리에 서너 개의 꽃송이를 매단 앙증맞은 패랭이꽃이었습니다. 마치 보릿고개의 문설주에 선 소년처럼 파리한 그 꽃송이를 보며 지게에 거름을 지고 올라가거나 콩이나 밀을 지고 내려오던 저는 자신도 모르게 <바위고개>라는 가곡을 흥얼거렸습니다. 마치 내가 그 십년도 넘게 머슴살이를 한 주인공이나 되는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소녀가 그 가사의 ‘우리 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50년도 더 지난 지금 패랭이꽃이 핀 고갯길에서 <바위고개>를 흥얼거리던 소년은 호호백발이 되고 그가 그리던 소녀도 은발이 투명한 할머니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호젓하고 외진 곳에 조그맣게 피어난 패랭이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크고 다양한 색깔의 꽃송이로 개량된 패랭이꽃이 도시의 가로나 공원에서 거대한 꽃무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버이날만 되면 온통 거리를 물들이는 서양 패랭이꽃 카네이션의 물결이 낯설기만 하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어지럽게 눈부신 꽃, 어질어질 황홀한 그리움이 펼쳐진 긴긴 기억의 회로를 더듬어 가면 지금도 여전히 패랭이꽃 몇 송이 피어있을 진장골짜기의 바위고개 언덕길... 지금도 듣기만 하면 가슴이 뭉클한 노래가사를 올립니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임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임
그리워, 그리워 눈물 납니다.

바위고개 언덕에 피인 저 꽃은
우리임이 즐겨, 즐겨 꺾어주던 꽃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임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 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 납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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