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21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 백로와 흰새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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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3 17:22 | 최종 수정 2021.08.0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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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귀 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백구야 껑청 뛰지 마라. 너 잡을 내가 아니로다.
옛사람들은 키가 껑충하고 깃털이 희고 고고한 자태로 날아가는 해오라기, 쇠백로, 중대백로, 황로, 황새, 심지어 덩치가 훨씬 큰 두루미까지 뭉뚱그려 학이라고 부르며 아주 고귀한 선비의 자태로 보고 신성시 하다못해 곱게 늙은 노인을 학발동안(鶴髮童顔)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들길을 한참 걸어 나타난 마을 뒷산의 솔숲이나 강이나 바다언덕의 솔가지에 하얀 댕기를 늘어뜨린 백로무리를 보는 것만 해도 상서로운 것 같아 학(鶴)동, 학(鶴)곡리, 학 마을처럼 학이 사는 마을에 사는 것만으로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한 30년이나 되었을까요. 충북 어딘가에 단 한 쌍 마지막 남은 황새의 수컷을 사냥꾼이 쏘아 과부황새 한 마리가 외롭게 살았는데 누가 그걸 또 심심풀이로 쏘아서 한반도에선 황새가 멸종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건 경제개발붐으로 한창 자연이 훼손될 때 이야기고 농촌인구가 줄고 노령화가 지속되면서 지금의 농촌은 그 귀하던 백로무리가 까마귀떼보다 더 흔한 존재가 되어 하늘 가득 무리지어 날아다닙니다.
어느 학교나 아파트 가까이 백로 서식지가 있어 악취와 소음으로 원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나오고요. 상서로움의 상징이 졸지에 불편함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주로 안노인네들이 밭농사를 짓는 이곳 명촌리에서는 한층 더 합니다.
이곳 할머니들은 저 쇠백로를 그냥 <흰새>라고 부르는데 수십 마리가 하얗게 볏논에 앉아 미꾸라지나 개구리를 잡고 꽥꽥거리고 우는 것도 그렇지만 웬만한 도랑이나 논바닥의 미꾸라지나 물고기를 멸종시키는 것은 물론 작은 못이나 저수지의 가장자리 갈대나 돌에 붙어사는 논고동(우렁이)도 아주 결딴을 내고 맙니다. 졸지에 길조(吉鳥)에서 망조(亡兆)가 된 것이지요.
우리 셋째 누님이 관리하는 조그만 칼치못에 옛날엔 잉어, 붕어, 가물치가 엄청 많았는데 철없는 베스 낚시꾼 하나가 치어를 풀어 토종 물고기가 멸종했습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 베스낚시를 하는 개그맨 지상렬씨만 보면 그만 패 죽이고 싶은 심정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 누님이 반찬이 없을 때 가끔 논 고동을 훑어 와서 매형의 속 풀이 해장국도 끓이고 우렁이된장도 끓이고 정구지를 넣고 회무침도 해 먹고 늦가을엔 고치미와 토란줄기, 들깨가루를 넣고 누루수름하게 논 고동 찜을 해서 별미로 먹었는데 저놈의 흰 새 때문에 요즘은 논고동구경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지난가을 퇴원한 제게 음식을 만들어주려고 칼치못에 들어갔던 누님이 종일 서너 마리밖에 우렁이를 잡지 못 하고 와서 멸종이나 면하라고 도로 넣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마침내 흰 새와 명촌누님과의 전쟁은 흰새의 일방적 승리로 최종 판정을 내리고 말았답니다. 이제 더 이상 논고동 찜은 먹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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