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20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 - 무화과, 무성한 그리움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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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2 18:22 | 최종 수정 2021.08.0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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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릴 적엔 무화과를 본 일이 없었고 성인이 되어 간혹 무화과를 접했을 때 푸르딩딩한 껍질 속에 조밀하고 붉은 낱알처럼 생긴 과육을 먹는다는 참으로 생소한 과일이었습니다. 또 조금 덜 익은 것을 잘 못 먹으면 입술이 부르트기도 하고 가지와 잎에서 끈적끈적한 진액이 나와 과히 살가운 존재가 되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 김지애의 <몰래한 사랑이란>이란 노래가 나와 온몸으로 달달 떨며 부르는 목소리와 단순하면서도 눈에 선한 가사가 상당한 호감으로 다가왔는데 지구온난화 덕분인지 어느새 전남 무안에 무화과가 집산지가 생기고 마트에서 쉽게 접할 정도가 되었고 제 아내를 비롯해 무화과를 즐겨먹는 마니아들도 생겼습니다.
아마도 무화과의 특징은 꽃이 피지 않는다는 과일이라는 것 말고도 거칠고 메마른 땅에서 너무나 무성하게 잘 자란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로 유목민이 살아가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 구약성경의 무대에 유독 무화과가 많이 자랐는지 포도, 올리브(감람)와 함께 가장 등장빈도가 높은 과일이기도 합니다. 달콤한 과즙도 그렇지만 무성한 그늘이 사막의 뜨거운 햇볕을 막아 많은 사람들이 그 그늘에서 쉬어 무화과가 평온한 휴식이나 가정을 상징하는 나무로 등장하기도 하고요.
명촌리의 집을 지으면서 저도 집 뒤 울타리에 무화과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그건 김지애의 노래처럼 무성한 무화과 그늘에서 지난날을 추억하며 이야기해고 싶다기보다는 아내가 무화과를 무척 좋아할 뿐 아니라 가장 빨리 자라는 속성수라 제일 먼저 우리가 여름에 휴식할 그늘을 만들어 줄 것 같아서였습니다. 신기하게도 그해 심은 나무에서 얼마간의 열매가 열어 아내도 잘 먹고 저는 내년쯤이면 아내와 같이 무화과그늘에 자리를 펴고 누워 <몰래한 사랑>을 흥얼거리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물 좋고 정자 좋은> 경우가 없다는 말처럼 그 사막성 식물은 유독 추위에 약했는지 이듬해 봄 밑둥치만 남기고 그만 다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다시 사다 심은 나무와 간신히 살아남은 나무에서 약간의 열매가 열기는 했지만 무성해지지도 못하고 다음겨울에 또 얼어 죽었습니다.
사진은 4년째를 맞이한 우리 집 무화과입니다. 몇 안 되는 열매를 따 먹은 후 겨울이 오기 전에 이번엔 부직포와 비닐로 잘 감싸 월동을 시켜 내년에는 꼭 무화과 그늘에서 <몰래한 사랑>을 들을 것입니다.
햇빛이 눈부신 가을날의 그리움이 투명한 그리움이 되고 코스모스가 핀 언덕길에서 고추잠자리의 날개 짓이 어지럽게 부서지는 안타까운 그리움이라면 무화과 그늘의 그리움은 소낙비처럼 무성한 그리움일 것입니다. 달달 떠는 목소리 김지애의 <몰래한 사랑>을 올립니다.
그대여 이렇게 바람이
서글피 부는 날에는
그대여 이렇게 무화과가
익어가는 날에도
너랑 나랑 둘이서 무화과 그늘에 숨어 앉아
지난날을 생각하며 이야기 하고 싶구나.
몰래 사랑했던 그 여자 그리고
또 몰래 사랑했던 그 남자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그 누굴 그 누굴 사랑하고 있을까.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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