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혹시 당국화(唐菊花)로도 불리는 과꽃을 아십니까? 우리 어릴 때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동요가 있었는데 그리 흔한 꽃도 아니지만 시골에서 자란 저도 그냥 당국화로 알고 있다가 중년이 넘어 우연히 무슨 책을 보고 그게 서울사람이 말하는 과꽃인 줄 알았습니다.
약간 자줏빛이 감도는 분홍빛의 동그란 꽃송이가 어디 하나 기운 데 없이 반듯하게 예쁜 과꽃은 특별히 선연하거나 화려하게 다가오는 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목구비도 반듯하고 눈빛도 그윽한 시골처녀처럼 볼수록 당당해 곱게 짠 모시나 삼베 올처럼 정갈하면서도 친밀한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 어릴 때의 아동문학가 어효선이 과꽃을 보면서 누나를 생각하는 노래를 쓴 모양입니다.
그 과꽃을 작년 봄에 종묘상 씨앗판매대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순간 사정없이 가슴이 울렁거려 단번에 꽃씨를 사다 심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사다 심은 줄기가 무성한 갖가지 서양화초에 묻혀 제대로 싹이 나지 않아 꽃구경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펜스 밑의 도로에 흙을 퍼다 좁은 화단하나를 더 만들고 비로소 제가 원하던 과꽃과 백일홍, 코스모스, 맨드라미, 봉숭아와, 나팔꽃, 코스모스를 심어 마침내 과꽃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목처럼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가 아니라 <올해 처음 과꽃이 피었습니다>입니다.
과꽃을 한참 들여다 보다 문득 제가 이제까지 과꽃에 그리 연연하게 된 것이 4명이나 되는 누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목소리만 들으면 울어버리는 18세가 많은 천치 같은 큰 누님은 벌써 하늘나라에 간지 13년째 다시는 만날 수가 없습니다. 어찌 보면 가장 과꽃과 많이 닮은 천진한 누님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작년에 혼자 된 네살 많은 막내누님은 아시동생이 몸이 아파 맘에 걸리는지 일주일에 한 번 쯤 와서 고기를 사주고 갑니다.
거기다 이웃에 사는 셋째누님은 어려서 부터 너무 고생을 하더니 자형도 일찍 죽고 자식 넷이 하나같이 힘이 들어 늘 우리 집에 와서 신세타령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어떤 때는 저나 아내가 많이 힘들 때도 있지만 우리 부모님이 재산 대신 누님하나를 제게 물려주신 걸로 생각하고 평생 숙제로 삼고 있습니다. .
그러나 제가 과꽃만 보면 억장이 무너지는 것은 저보다 열다섯 살이 많은 둘째 누님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저를 업어 키워 한 평생 <내 동생 득수>를 입에 달고 사는 누님이 치매에 걸려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10년이 되었는데 더 나아지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이제 두 아들이나 종손자의 이름마저 잊어가면서 자기 아들들을 <니가 내 동생 득수제?>하고 세월을 보내는데 한번 가야지 하면서도 잘 되지 않습니다.
이제 찾아가도 저 말고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 하는 데다 무얼 잘 먹지도 못 하고 돈도 소용이 없지만 무엇보다 누님이 제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싶어 자꾸 망설여지는 것입니다.
한 포기에 수십 송이나 핀 크고 작은 꽃송이를 보며 어릴 적 구식 혼례식장을 담 너머서 바라보던 마을처녀들, 그 중에 셋째 누님이 낀 대여섯 명의 처녀들이 대보름날 남천내공굴에 아버지 몰래 다리를 밟으러가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운 기억은 이내 큰 누님과 작은 누님의 애달픈 기억으로, 다시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다 군대시절 휴가 나온 저를 잡고 엉엉 울던 사촌누님으로 옮겨갔습니다.
참으로 편안하고 덤덤하지만 한 없이 아련한 꽃, 당국화를 보며 조그맣게 혼잣말을 해 봅니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기왕이면 가사도 한번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과꽃 예쁜 꽃을 드려다 보면
꽃 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 지 온 삼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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