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40 여름에서 가을 사이 - 구름에 달 가듯이
이득수
승인
2021.08.15 13:00 | 최종 수정 2021.09.03 17:19
의견
0
폭풍전야라는 말도 있고 태풍일과(颱風一過)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과연 솔릭이 한반도를 관통한 긴장의 밤을 보내고 나니 초록 들판을 스쳐 산기슭을 찾아온 한층 선선해진 바람에 마음이 푸근해지며 사람 사는 게 단순히 날씨하나 좋고 말고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가 싶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오후에 넘어진 고춧대도 묶고 화단을 손보면서 무성한 나뭇가지도 좀 자르고 한껏 상쾌한 기분으로 저녁을 먹고 나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잔디밭의 파라솔 밑에 아내를 불러내어 차를 한잔 나누며 모처럼 전원생활의 재미를 누렸습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보내다 문득
“야, 달이 너무 밝다! 이렇게 밝은 달은 평생 처음이야.”
바람에 날리 듯 구름사이로 빠르게 지나가는 둥근 달을 보고 아내가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러고 보니 태풍이 비와 매연과 티끌은 물론 미세먼지까지 깨끗이 씻어낸 드높은 하늘에 정말 이솝동화에 나오는 커다란 치즈나 이태백이 강물에서 건져낸 것 같은 둥근달이 산뜻하게 비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둘이 한참동안 달을 바라보자 저도 같이 달을 보던 마초가 폴짝폴짝 뛰며 자기와 놀아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책에서 개가 달을 보고 짖는다는 이야기는 보아도 숨바꼭질을 하자고 뛰는 개는 처음이라 어리둥절하다 문득
(아하!)
박목월의 시 <나그네>에 나오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떠올랐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두둥실 높은 달 아래 구름이 떠밀리듯 바람에 실려 가는 형상인데 목월은 어떻게 <구름에 달 가듯이>의 반전을 떠올렸을까요?
만약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달 아래 구름 가듯>하면 도무지 정감이 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겨우 열 줄의 짧은 시에 <구름에 달 가듯이>와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는 단 두개의 테마로 그렇게 울림이 좋은 시를 지은 목월은 역시 대단한 시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낙과피해는 좀 봤지만 태풍이 이런 멋진 하늘을 선물해서 참으로 행복한 저녁이 되었습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