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명촌리 사계(四季) 142 여름과 가을 사이 - 태풍이 한 번 쓸고 지나간 뒤(颱風一過)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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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4 19:26 | 최종 수정 2021.09.0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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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스쳐간 밭모퉁이에서 뜻밖의 희생자 한 무리 만났는데 검정외투를 단정하게 입은 장수풍뎅이 4마리와 호랑나비 한 마리였습니다.
흉포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견디지 못해 떨어져 죽은 것이겠지만 그렇게 알뜰히 슬픈 일은 아닙니다. 아무리 강풍이 불어도 하루살이나 실잠자리 같은 아주 작은 곤충도 다들 나뭇잎이나 풀뿌리에 매달려 잘도 버티는데 그 정도의 바람에 떨어져 죽었다면 이미 짝짓기와 산란(産卵) 같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힘이 빠져 겨우 숨만 붙어있던 노인네(?)들이었겠지요.
그런데도 참 재미가 있는 것은 이미 숨이 끊어진 지가 오래 된 그 풍뎅이와 종잇장처럼 얇은 호랑나비를 건드리자 이미 죽었음에도 본능적으로 길쭉한 앞발의 까칠한 촉수로 손가락을 찔러대며 달라붙은 것이었습니다.
다 늙어 곤충채집을 하기는 뭣하지만 손녀들에게 보여주려고 사진을 찍다 기왕이면 짝짓기 철이 돌아와 사생결단을 벌이는 두 마리의 수컷의 전투로 설정하고 슬쩍슬쩍 엿보는는 암컷 두 마리와 아무 이해관계도 없이 무심히 바라보는 호랑나비를 배치했습니다.
지금쯤 저 네 마리의 풍뎅이는 하늘나라에서 애니메이션 <라바>에 나오는 기갑사단이 되고 호랑나비는 장자의 꿈속을 날아다니는 호접몽(胡蝶夢)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 소설가 / 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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