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바로 옛날의 월남 사이건만(此昔月南寺·차석월남사)/ 지금은 안개와 노을 속에 적막하기만 하네.(煙霞今寂寥·연하금적료)/ 산은 벌써 노을빛 비치는데(山曾暎金碧·산증영금벽)/ 물은 절로 아침 저녁 보낸다네.(水自送昏朝·수자송혼조)/ 옛 탑은 촌락의 담장 의지해 서 있고(古塔依村塢·고탑의촌오)/ 낡은 비석돌은 다리로 놓여 있다네.(殘碑作事橋·잔비작사교)/ 귀중한 보배가 하나도 없으니(一無元寶訣·일무원보결)/ 흥망성쇠를 애써 물어서 무엇하리오.(興廢問何勞·흥폐문하로)
백호문학관에 전시된 임제의 저술들. [사진= 임신영 작가]
위 시는 조선시대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의 「월남사 터를 지나며」(過月南寺遺址·과월남사유지)」로, 그의 문집인 『임백호집(林白湖集)』 권 1에 수록돼 있다.
그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아버지 임진(林晉)과 어머니 남원 윤씨 윤개(尹塏)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지금도 나주 임씨 집성촌이다. 할아버지는 별시 문과에 급제해 예조참의·호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영산강이 바로 앞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영모정(永慕亭)을 지은 임붕(林鵬·1486~1553)이다. 그는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의 외조부이다.
백호 임제의 조부인 임붕이 세운 영모정. 임제는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선비들과 시를 읊었다. [사진출처= 나주시청]
임제는 1577년에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흥양현감·서북도병마평사·관서도사·예조정랑·홍문관 지제교 등을 지냈다. 이달·백광훈·허균·성혼·이이·정철·신흠 등과 교류하였다. 그는 「수성지(愁城誌)」·「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남명소승(南冥小乘)」 등 한문소설과 『임백호집』을 저술한 문인이다.
위 시에 등장하는 월남사(月南寺)는 전남 강진의 월출산을 배경으로 강진군 성전면 월남마을에 있는 절터이다. ‘월남사재월출산남고려승진각소창유이규보비(月南寺在月出山南高麗僧眞覺所創有李奎報碑: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있는데 고려시대 진각국사가 창건하였고 이규보가 찬한 비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고려 후기에 창건된 듯하고 폐찰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절터에는 민가가 있으며 마을 입구 양쪽에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보물) 과 진각국사비가 있다.
나주 백호봉에 있는 임제의 묘 앞에 서 있는 미수 허목의 묘비명. 허목은 임제의 외손자이다. [사진= 나주시청]
임제의 위 시는 옛날의 월남사지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읊은 작품이다. 수련에서는 옛날에 크고 웅장했다고 알려진 월남사에 와보니 지금은 무너져 터만 남아 안개와 노을 속에 적막하다며 쓸쓸함을 피력하고 있다. 경련에서는 산에는 노을빛이 비치는데 물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며 자연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함련에서는 조성미가 뛰어나고 웅장한 삼층석탑 옆까지 민가가 들어와 있고, 비석들은 다리 놓는 재질로 사용되어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풍상에 시달리며 과거에 화려했던 절의 모습은 없어지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을 서술하듯 읊고 있다. 미련에서는 이제 자취만 남은 월남사지에서 세월의 무상함과 흥망성쇠에 대한 깊은 회의를 토로하고 있다.
필자도 이전에 월출산을 산행하기도 하고 백운동별서정원을 방문하면서 월남사를 몇 차례 들러 쓸쓸하게 서 있는 삼층석탑을 보면서 임제처럼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전남 강진의 월남사지. 필자가 몇 차례 답사하면서 찍었다. [사진=조해훈]
그는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호방한 성격에 시와 술, 검과 퉁소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아직 단종과 사육신이 복권되기 이전 시기임에도, 이를 은유한 소설 「원생몽유록」을 지었을 만큼, 대범하였다고 한다.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고 알려진 그는 그러나 호방하고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에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고, 관리들이 서로를 비방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서북도병마평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 지냈던 일과 기생 한우(寒雨)와 시조를 주고받은 일, 평양 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평가하길 기이한 인물이라고 했으며 또 한편에서는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반된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의 글은 높이 평가됐다.
유명한 기녀였던 황진이가 사십에 병에 걸려 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대로변에 묻어 주기를 유언하여 송도(松都) 대로변에 묻혔다. 황진이의 기(氣)와 예(藝)를 높이 평가했던 임제는 그녀가 살았을 때 만남을 바랐지만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아쉬워하였다. 그가 서북도병마평사로 임명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 앞에 제문을 짓고 제를 지냈다. 그러면서 시조 ‘청초 우거진 골에’라는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어 그를 설어 하노라”
그는 고향인 화진리에서 39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아들들에게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라고 말하곤 “내가 죽거든 곡(哭)하지 마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앞의 시가 실린 임제의 시문집인 『임백호집』(4권 2책)은 원래 아우인 환(懼)이 출간하려고 이항복이 선정(選定)하고 편차하여 서문까지 썼으나 뜻대로 안 되었다. 임제의 종제(從弟)인 서(㥠)가 1621년(광해군 13) 함양군수로 있을 때 간행하였다.
그의 외손자인 미수 허목은 임제의 묘비명에 ‘당시는 동서분당의 의론이 일어나 선비들은 명예로 다투고 서로 추켜세우고 이끌어 주고 하였다. 그런데 임제는 자유분방하여 무리에서 초탈한 데다 굽혀서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적었다. 즉 임제는 동인·서인 어느 당파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붕당에 비판적인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5일 필자는 임제가 공부하고 선비들과 시를 읊었다는 영모정 등을 찾아 그의 흔적을 찾았다. 영모정 인근에는 그를 기리는 백호문학관이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