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보는 사람 이야기(116) 경남 합천에서 전남 구례로 옮겨 강학 근세 유학자 정기(鄭琦)

정재규 제자로 1927년 구례 오미리 이주
임란 때 明 천만리 기리는 추원재 記 씀
강학 공간 덕천정에 덕천사 건립해 제향

조해훈 승인 2024.05.19 11:52 의견 0
율진 정기 선생을 제향하는 덕천사 입구. [사진=조해훈]

“帶方西環峰負癸之原, 有堂斧四尺而螭龜巋然者, 故萬曆壬辰東援總督將, 花山君諡忠壯, 思菴千公衣履之藏也. 丙丁之亂, 子孫流離逃竄, 墓遂不守. 其後歷數百年, 而至高宗丙午. 始得其誌石而徵焉. … ….”(대방서환봉부계지원, 유당부사척이리구규연자, 고만력임진동원총독장, 화산군시충장, 사암천공의리지장야. 졍정지란, 자손유리도찬, 묘수불수. 그후역수백년, 이지고종병오. 시득기지석이징언. … ….)

“남원 서쪽 환봉에 계방을 등진 언덕이 있다. 이곳에 4척 당부(堂斧)가 있는데, 용과 거북의 형세로 우뚝한 자태다. 옛적 만력 임진년에 조선을 구원하였던 총독장 화산군 충장공 사암 천 선생의 유택이다. 병자난과 정축난으로 자손이 흩어져서 묘소를 숨겨오다가 마침내는 묘소를 수호하지 못하였다. 그 후 수백 년이 지나서 고종 경오년에 지석을 처음으로 발견되어, (천 선생의) 묘소임이 확인되었다. … …”

율진 정기의 간찰. 개인소장

위 글은 근세 유학자인 율계(栗溪) 정기(鄭琦·1878~1950)의 문집인 『율계집(栗溪集)』의 「追遠齋記(추원재기)」에 들어있는 내용 중 앞부분이다.

정기가 「추원재기」를 쓰면서 어떻게 하여 기문(記文)을 쓰게 되었는지의 과정을 밝히고 있다. 위 문장의 주인공인 사암(思菴)은 천만리(千萬里·1543~미상)이다.

알다시피 천만리는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무신으로 조선에 귀화한 장군이다. 그는 중국(당시 명나라)에서 1571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이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 때 천만리는 조병영량사(調兵領糧使)로서 아들 천상(千祥)과 함께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조선에 왔다. 평양 전투를 비롯하여 곽산·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전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나자 1600년(선조 33) 8월 만세덕(萬世德)·이승훈(李承勛)은 귀국하였으나 그는 조선에 머물러 살았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생각하여 그를 화산군(花山君)에 봉하였고, 그의 아들 천상도 뒤에 한성윤에 승진시켰다.

그런데 후손들이 여러 사정으로 천만리의 묘소를 제대로 지키기 못하였다. 그 후 고종 때 그의 묘가 발견되어 후손들이 신도비를 세우고 그 아래에 추원재를 건립하였다. 추원재를 편액해 기문을 정기에게 써 주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정기가 위 기문을 지은 것이다.

그러면 위 기문을 쓴 율계 정기가 어떤 사람인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그는 한말의 학자·항일운동가로, 그다지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본관이 서산(瑞山)인 정기는 경남 합천 율진(栗津) 출신으로,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1843~191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崔益鉉·1833~1906)을 도와 동지들을 규합하는 등 국권회복에 힘썼다. 1914년 합천 무산(武山)에 정사(精舍)를 짓고 학문에 몰두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1921년 만주와 간도를 세 차례 오가며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일제의 통치가 더욱 거세어지자 금강산·지리산 등을 주유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1927년에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덕천(德川)으로 이사하여 오원재(五爰齋)와 덕천정(德川亭)을 짓고 강학당으로 삼아 후진을 양성하였다. 덕천정은 토지면 오미리 내죽마을에 있는 정자이다. 1927년 이 정자를 건립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현재 정자 근처에는 율계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덕천사(德川祠)가 있다.

정기가 강학하던 덕천정 뒤쪽에 그를 제향하는 덕천사가 세워져 있다. [사진=조해훈]

정기는 1934년에 지리산을 유람한 후 「유방장산기(遊方丈山記)」를 짓기도 하였다. 이 지리산 유람기 역시 『율계집』에 수록돼 있다. 그의 유람기는 1930년대 무렵 지리산 일대의 지리학 연구와 생활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를테면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에는 덕평봉(德坪峰·1,521m)이 있다. 이 일대에 당시 30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유방장산기(遊方丈山記)」에 기록돼 있다. 그는 산행 중에 덕평마을에서 하루를 묵었다고 적고 있다. 덕평은 지리산 청학동의 한 장소로도 지목된 바 있는 곳이다.

정기 사후 16년 만인 1967년에 제자들이 뜻을 모아 덕천정 뒤뜰에 덕천사(德川祠)를 건립하고 해마다 3월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덕천사는 2003년 7월 7일 구례군의 향토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되었다.

정기의 제자인 안병탁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초등서사 전경. [사진=조해훈]

한편 구례군에 따르면 정기의 제자 중에 겸산(兼山) 안병탁(安秉柝·1904~1994)이 있다. 안병탁은 전남 장흥 출신이지만 정기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1933년에 구례 문척면 토금리로 이사했다. 그는 토금리로 이사한 이듬해인 1934년에 아랫방에 오봉산방(五鳳山房)이란 서당을 개설하였고, 1957년에 초동서사(草洞書舍)를 건립하여 세상을 버리기 전까지 강학하였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