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총애로 금빛 말까지 불러주셔서(寵渥徵金馬·총악징금마)/ 영예롭게도 선생님의 모친을 뵈었습니다.(恩榮覲北堂·은영근북당)/ 속세의 먼지 속 봉황은 깃이 짧아 날지 못하지만(塵埃凰短羽·진애황단우)/ 풍우 속에서도 기러기는 줄을 이어 날아갑니다.(風雨雁聯行·풍우안연행)/ 새 벗들이 늘어나 기꺼이 기대고 있는데(喜託新知益·희탁신지익)/ 작별의 말이 분분하여 놀라고 있습니다.(驚看別語忙·경간별어망)/ 깊어가는 외로움에 허망함을 느끼던 차에(渾深孤露感·혼심고로감)/ 목 빼고 우러러 보니 마음속에 병이 났습니다.(延望疚中腸·연망구중장)
위 시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퇴계선생님께 올리며(上退溪先生·상퇴계선생)』로, 『고봉전서(高峯全書)』 제1권에 들어 있다. 기대승이 퇴계 이황(1501~1570)에게 써 올린 시이다. 둘째 행의 ‘北堂(북당)’은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기대승은 퇴계와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32세에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의 제자가 되었다. 이황과 12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폈다. 기대승은 1558년 대과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당시 서울에 올라와 있던 퇴계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한 이후,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기대승은 퇴계를 몹시 존경하였고, 퇴계도 그를 학문에서는 당대의 제일로 인정하였다. 퇴계가 서거할 때까지 계속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뿐 아니라 인생과 정치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편지들이 『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 3권 및 『양선생이기왕복서(兩先生理氣往復書)』 2권으로 묶여서 전한다. 퇴계 서거 후에는 기대승이 퇴계의 묘갈명 후서(後敍)와 묘지(墓誌)를 지었다. 기대승과 퇴계의 관계를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이 글에서는 기대승이 중심인물이므로, 그가 어떤 사람이며, 그의 생애 전반은 어떠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기대승은 본관이 행주(幸州)로, 1527년(중종 22) 전라도 광주목 소고룡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아버지 물재(勿齋) 기진(奇進·1487~1555)과 어머니 진주 강씨(晉州姜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려시대의 재상 기순우의 14대손이며, 순제의 황후 기황후의 친정아버지 기자오는 그의 11대조 기필선의 둘째 형 기윤숙의 증손자였다. 기대승의 행주 기씨 선조들은 대대로 서울(한성)에 살았으나, 기대승의 아버지 기진은 동생 기준(奇遵·1492~1521)이 논죄를 당해 자결한 뒤로 출세에 대한 뜻을 접고, 어머니마저 이른 나이에 별세하자 복제(服制)가 끝난 뒤 곧 광주로 낙향하여 살았으므로 기대승이 광주에서 태어난 것이다. 기진은 한성부 청파 만리현 출신이다.
기대승은 1549년(명종 4) 사마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사관이 되었다. 1563년 사가독서하고, 주서를 거쳐 사정(司正)으로 있을 때, 신진사류의 영수로 지목되어 훈구파에 의해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종형 기대항(奇大恒·기준의 아들)의 상소로 복직되었다. 1567년(명종 22)에 중국의 사신을 멀리까지 나가 맞아들이던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같은 해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소속의 종3품인 집의가 되고, 이어 홍문관에 소속된 종3품 관원인 전한(典翰)이 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와 이언적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우부승지로서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일을 맡아 보는 시독관을 겸직하였다. 1570년 봄에 휴가를 요청해 고향으로 돌아갔고 고마산 남쪽에 서실을 짓고 살면서 학문에 전념했는데, 제자가 되어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고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또 명나라에 가는 사신으로 임명되었지만 사양하였다.
1571년 여름에 홍문관 부제학과 이조 참의 등으로 임명받았지만 거절하였다. 1572년에는 종계변무의 일로 주청부사에 임명되자 그 일이 중요하다고 여겨 어쩔 수 없이 조정으로 나갔다. 그 와중에 대사성에 임명되었다가 조정에 들어가자 사임하고 고향 광주로 돌아갔다.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11월 초하룻날에 정북 정읍의 고부(古阜)에서 안타깝게도 향년 46세를 일기로 죽고 만다. 안타깝게도 객사한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귀향하는 도중 천안군에 이를 때 종기를 앓았는데, 태인현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졌다. 이에 함께 가던 일재 이항의 문인인 김점(金漸·1369~1457)의 집에 이틀간 머물렀다. 그곳에서 결국 세상을 버린 것이다. 김점은 명종 때 뛰어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연은전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후 벼슬에서 물러나 스승 이항이 있던 고부 우일(현 정읍시 정우면 우일리)로 이주해 살던 상태였다.
기대승이 이황과 사단칠정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조선시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변론 후 이황은 그의 학식을 존중하여 대등한 입장에서 대하였다.
기대승은 서예에도 능한 문사였다. 그의 사후 1590년(선조 23)에는 생전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光國功臣三等)에 추록되기도 하였다. 덕원군(德原君)·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의 월봉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사답게 『고봉집(高峰集)』·『주자문록(朱子文錄)』·『논사록(論思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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