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인 남계서원(灆溪書院)을 창건한 주역인 개암(介庵) 강익(姜翼·1523~1567) 선생의 탄신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난 6일 남계서원에서 열렸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남계서원(원장 이창구)은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에 소재하고 있다.
이날 비가 많이 내리는 가운데 오전 9시 30분부터 행사가 시작됐다. 사전행사로 동래학춤 시연과 시낭송이 열렸고, 이어 사당에서 신위를 모시고 나오는 출주례(出主醴), 그리고 남계서원 편액이 걸린 명성당(明誠堂)에서 탄신제가 시작됐다. 다음으로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제향의 초헌관은 최종수 성균관장, 아헌관은 조종명 남명 조식 선생 후손, 종헌관은 강대수 진주강씨 함양군 전 종회장이 각각 맡았다.
기념식은 명성당 청마루에서 국민의례와 내빈소개에 이어 강민구 개암기념사업추진위원장의 ‘개암 강익 선생 남계서원 창건과정 보고’와 공로패 및 감사패 증정이 진행됐다.
이창구 남계서원 원장은 환영사에서 “30살의 나이로 10년간(1552~1561) 각고의 노력과 헌신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남계서원을 창건에 45세의 자기 일생을 바친 개암 강익 선생께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며, “강익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행사에 먼 길 마다않고 동참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최종수 성균관장은 “남계서원에서 개암 선생 탄신기념행사의 축하 말씀을 드리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지역민의 풍속 순화와 교육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잘 수행하는 남계서원처럼 성균관도 서원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 오늘 가뭄을 해갈할 비를 내려주신 500년 전의 선현께 더욱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축사를 했다. 그 외 진병영 함양군수와 박용운 함양군의회 의장을 대신하여 정현철 함양군의회 부의장, 김재웅 경남도의원 등의 축사가 있었다.
두 번째 행사로 탄신제례 기념식수가 계획돼 있었지만 비가 많이 내려 생략하고, 미리 심은 은행나무 앞에서 주요 내빈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세 번째 행사로는 ‘개암 강익과 남계서원’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기념식이 열렸던 명성당에서 김윤수 일두기념사업회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학술대회에서는 이해준 공주대 명예교수가 「함양 남계서원의 문화와 성격」, 최석기 경상대 명예교수가 「남계서원 현판에 투영된 강익의 교육이념」, 정우락 경북대 교수가 「개암 강익의 심학(心學)과 그의 시가문학」을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함영대 경상대 교수가 주제발표가 끝난 뒤 총평을 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행사인 묘소참배를 끝으로 기념행사가 모두 마무리됐다. 남계서원 소회의실에서는 순유 김성현 등의 서예작가와 함양 지역민들이 강익 선생의 한시 등을 옮긴 서예 작품 전시가 이뤄졌다.
한편 개암 강익 선생의 생애와 남계서원 창건 과정에 대해 간락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강익 선생은 1523년 함양군 수동면 효리에서 부친 강근우의 3남 중 2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진주(晉州)로, 자는 중보(仲輔), 호는 개암(介庵)이다. 15세인 1537년(중종 32)에 당곡(唐谷) 정희보(鄭希輔·1488~1547)의 문하에 나아가 배웠다. 당시 그 문하에는 노진(盧禛)·이후백(李後白)·양희(梁喜) 등이 있어 이들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20세인 1542년(중종 37)부터 남명 조식의 학문에 관심을 보였으며, 29세인 1551년(명종 6)에는 함양군 안의면 월림리의 화림동(花林洞)을 찾은 조식을 처음으로 대면했다.
30세인 1552년 남계서원 창건을 주도했다. 31세인 이듬해 함양 마천 창원마을에 양진재(養眞齋)를 짓고 7년간(1553~1559) 머물면서 강학을 했다. 양진재 유물로 주련(柱聯)과 현판, 기문(記文)이 있으며, 이 유물들은 현재 함양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31세 때부터 6년간(1553~1558) 서원 창건이 중단됐다. 32세인 1554년에 조식 선생이 있는 산청군 시천면 산천재(山天齋)로 찾아가 『대학』과 『논어』를 강론하였으며, 36세인 1558년에는 조식으로부터 수개월 동안 『주역』을 배우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다 37세인 1559년 윤확 군수가 부임해 공사를 재개했다. 그리하여 그해 강당을 완성했으며, 1561년 사우를 완성했고, 선생 39세인 1561년 서원을 완성하여 같은 해 2월 16일에 문헌공인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 위판을 봉안했다. 그해 강익 선생은 남계서원 초대원장에 취임했다.
42세인 1564년 김우홍 군수가 부임하여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짓고, 건물에 명명하여 편액을 걸었다. 강당을 ‘명성(明誠·밝으면 성실하다)’이라 편액하고, 명성 왼쪽의 재를 ‘거경(居敬)’, 오른쪽의 재를 ‘집의(集義)’, 거경 앞의 재를 ‘양정(養正)’, 헌(軒)을 ‘애련(愛蓮)’, 집의 앞의 재를 ‘보인(輔仁)’, 헌을 ‘영매(咏梅)’, 대문을 ‘준도(遵道)’라 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44세인 1566년(명종 21) ‘남계(藍溪)’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고, 그 이듬해 45세인 1567년에 별세했다.
위에서 간략하게 설명했듯이 강익 선생은 남명 조식의 문도로 1552년(명종 7) 남계서원의 건립을 제안하고 창건을 주도했다. 남계서원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됐다. 남계서원은 수령과 감사가 주도한 소수서원과 달리, 함양 사림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건립되었다.
남계서원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1603년(선조 36) 나촌(羅村·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광해군 4) 본래의 장소인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1667년 사액 서편에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을 배향하고, 1689년에 사당 동편에 강익 선생을 배향하였다. 2009년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고,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했던 개암 강익 선생을 비롯해 갈천(葛川) 임훈(林薰), 덕계(德溪) 오건(吳健), 옥계(玉溪) 노진(盧禛),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등은 모두 남명의 핵심 문도들이었다.
한편 강익 선생의 문집으로 『개암집(介庵集)』이 있으며, 개암집 목판(수량 186매)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7호로 남계서원에 보관돼 있다. 또한 남계서원 건립 당시 기부내역서인 ‘부보록(裒寶錄)』과 남계서원 건립 권선문인 「천령서원수곡통문」 등도 남아 있다.
강안구 개암기념사업추진위원회 총무국장은 “이날 비가 많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900여 명이 강익 선생 탄신 500주년 행사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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