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필자가 거주하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목압마을의 목압서사에서 하동읍내에 있는 셀렉토 카페에 와 책을 읽고 글도 쓴다. 목압마을 버스정류장~읍내를 운행하는 농어촌버스 요금 1,100원만 내면 오갈 수 있다.
카페에서 작업을 하다 지겨우면 뒷문으로 나가 산책을 한다. 산책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왼쪽으로 가면 옛 하동역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하동경찰서와 하동군청 사이의 도로를 건너 섬진강으로 연결된다. 이 길을 따르면 섬진강 위 옛 철길로 걸을 수 있어 강 건너 광양으로 가게 된다. 필자의 짐작으로 산책로의 왼쪽 끝인 옛 하동역에서 섬진강 건너 광양까지의 거리가 대략 2km쯤 될 것 같다.
산책길 왼쪽은 읍내의 점포들이 쭉 연결돼 있고, 오른쪽은 모가 심어진 논들과 매실나무 밭이 있다. 하동군청이 카페에서 직선거리로 200여m 떨어져 자리해 있다.
옛 하동역 방향으로 걷다보면 김광수(1938~2021) 시인의 시 「귀향초(歸鄕抄)」가 새겨진 시비를 먼저 만난다. 김 시인은 하동군 양보면 지례리에서 출생하여, 197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어 문단 활동을 하였다. 그는 시조집 『등잔불의 肖像』·『길을 가다가』·『曲 없는 返歌』 등을 펴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정류장 안팎에서 어르신들이 휴식하고 계셨다. 안에는 에어컨이 나오고, 바깥에는 나무 그늘이 시원했다. 맞은편에 하동에서 유일한 응급실이 있는 중앙의원이 있다.
옛 하동역 쪽으로 더 걸어가니 큰 돌에 ‘정호승 시인길’이 새겨져 있다. 바로 옆에는 책장 모양의 정호승(1950~ ) 시인의 시 2편이 실려 있다. 왼쪽 페이지에는 「봄길」, 오른쪽 페이지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각각 실려 있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정 시인은 읍내서 태어어나,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가 당선되어 시작 활동을 한 그의 시는 많은 독자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위 돌에 새겨진 시 외에 시 「수선화에게」·「슬픔이 기쁨에게」 등도 유명하다.
여기서 더 걸어가니 철로 옆에 남대우(1913~1948) 시인의 「우리 엄마」라는 동시가 적힌 시비가 있다. 남 시인은 읍내에서 태어났다.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쥐와 고양이」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 광복 이전까지 동요와 동시 170여 편을 발표하였고, 동시집 2권을 상재하였다.
산책길 오른편은 논으로, 짙은 녹색의 모가 쭈욱 심어져 있어 인상적이다. 조금 더 걸어가니 미강 정순영(1949~ ) 시인의 시 「하동골에서」가 큰 돌에 새겨져 있다. 정 시인은 동명대학교 총장과 세종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는 1974년 시 전문지 『풀과 별』지 추천을 완료하면서 문단에 나와 『시는 꽃인가』·『침묵보다 더 낮은 목소리』 등 여러 권의 시집을 펴냈다.
길을 따라 더 걸으니 옛 하동역 뒤쪽이 나오고, 철로 변에 역시 하동에서 태어난 김연동(1948~ ) 시인의 시 「하동역」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 전체 4연으로 구성된 이 시의 첫 연만 보면 다음과 같다. “삼엄한 입영열차 가림막 틈 사이로/ 반기듯 다가오는 낯익은 철로 변에/ 해 맑은 코스모스가 전송하듯 흔들었다.”
1980년 12월 16일 필자가 진주 천정국민학교에 집결하여 입영열차를 타고 논산훈련소로 떠나던 기억을 생각나게 하는 시이다. 김 시인은 1987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시조문학』을 천료하고, 『월간문학』 신인상에도 당선되었다. 교직에 종사해 김해여자중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니 왼편에 ‘慶全線全通 大統領 朴正熙 1968년 2월 7일’, 오른편에 “여기 건설의 의욕은 또 하나의 새 역사를 기록했다. …. 이은상 글 이철경 글씨”라고 큰 돌에 글이 새겨져 있다. 아마 1968년에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경전선이 개통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 같다.
여기서 더 가니 기차가 오가던 굴다리가 있는데, 각종 차량으로 막혀 있다. 산책길 끄트머리 의자에는 할머니 여섯 분이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계셨다.
할머니들 앞으로 약간 아래로 난 길로 접어드니 개망초꽃들 사이로 꽃양귀비 하나가 주홍색으로 예쁘게 피어 있다. 이제 왔던 길을 따라 천천히 돌아간다.
출발했던 셀레토 카페 뒤를 지나 LH아파트와 건강보험공단 사이의 산책로를 걷는다. 산책로 양 옆으로 각종 미술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안내 표지판을 보니 ‘공공미술 2020 프로젝트’라고 적혀 있다. 이어지는 글에 “‘2020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코로나 19로 인해 예술인들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예술인 뉴딜정책으로 미술인 일자리 제공과 지역주민의 문화향유 증진을 목적으로 추진된 … ”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어 김남호(1961~ ) 시인의 시 「작년에 부는 바람처럼」이 새겨진 시비를 만났다. 1961년 하동 출생인 김 시인은 경상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한 후 중등학교 수학교사를 지냈다. 2002년 계간 『현대시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2005년 계간 『시작』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링 위의 돼지』·『고래의 편두통』·『두근거리는 북쪽』 등이 있다. 현재 악양의 최참판댁 영역에 있는 토지문학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여기서 더 가면 하동송림 위를 거쳐 섬진강을 건너는 철길로 산책로가 이어진다. 그러니까 옛 하동역을 거쳐 섬진강 건너 전라남도 광양시로 가던 경전선이 폐선이 되고 다른 쪽으로 새로이 철길이 개설되었다. 그리하여 폐선이 된 철길로 사람들이 산책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현재의 하동역은 옛 하동역에서 대략 500m 옆으로 이전되어 있다. 이전된 하동역 옆에는 읍내에 있던 하동시외버스터미널도 옮겨져 있다.
이 산책로 입구에는 원형 모양의 양식이 서 있다. 이 입구 왼쪽에 역시 하동 출신의 강남주(1939~ ) 시인의 시 「해량촌 옛집」이 새겨져 있다.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과객이라서 알 턱이 없을 텐데/ 나를 맞은 옛집은/ 스스로 허물어지기를 잠시 멈췄다./ 자(尺)치기하며 놀던 마당은/ 60년 이상을 좁아지기만 했고/ 숭숭 뚫린 양철지붕과 헐벗은 벽은/ 내가 자라던 때의/ 그 속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늙으면서 낮아진 내 키보다/ 훨씬 낮아진 돌담 안에서/ 봉숭아만 아직껏 제 자리를 지키며/ 허물어지지 않고 웃고 있었다./ 내가 떠난 지 오래 된/ 해량촌 나의 옛집.”
시를 읽고 나니 마음이 짠하다. 강 시인은 부경대학교 교수와 총장을 지냈다. 『시문학』으로 추천이 완료되어 시인으로 활동했다. 2013년에는 『문예연구』 신인 소설상에 당선되어 시와 소설을 함께 쓰고 있다. 그는 『흔적남기기』·『낯선 풍경 속으로』 등 여러 권의 시집과 시 평론집 및 소설집 등을 펴냈다.
산책로를 따라 더 걸어가면 좌우로 펼쳐진 섬진강을 조망하며 다리를 건널 수 있다. 다리를 건너면 광양이다. 이 산책로를 걸으면 기분이 산뜻하지만, 하동 출신 시인들의 시를 덤으로 읽을 수 있어 좋다. 산수가 아름다워서인지 이처럼 하동에는 시인과 교육자,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물론 이 산책로에 시비가 세워지지 않은 시인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테면 이미 타계한 시집 『정공채 시집 있습니까』의 정공채 시인과 시집 『농민의 아들』의 정규화 시인 등이 있다. 하동 출신으로 현재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도 많다. 읍내의 최영욱·이종수 시인과 화개면 범왕의 김용철 시인, 화개 용강의 김필곤·강경주 시인 등이다.
소설가로는 북천면 이병주문학관의 주인공인 이병주 선생도 있고, 젊은 소설가로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하아무 선생 등도 있다.
하동 출신은 아니지만 악양면에 박남준 시인도 있고, 부산서 들어와 청암면에 거주하는 강훈담 시인 등도 있다.
2017년 봄에 화개면 목압마을로 귀촌한 필자 역시 하동 출신은 아니지만 1987년 『오늘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시를 쓰고 있어, 하동 읍내 ‘시인의 길’을 걷는 감회가 남다르다. 역시 하동을 '문학도시'라고 명명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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