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의 검푸른 연기에 동남동녀 아득하고(丱角森森東海之蒼煙·관각삼삼동해지창연)/ 상산의 푸른 봉우리에는 붉은 지초 빛나네.紫芝曄曄商山之翠巓·자지엽엽상산지취전)/ 이처럼 당시 진나라를 피할 만한 곳은(等是當時避秦處·등시당시피진처)/ 도원이 가장 좋아 신선이라 하였네.(桃源最號爲神仙·도원최호위신선)/ 시냇물이 다한 곳에 산의 입구가 뚫렸으니(溪流盡處山作口·계류진처산작구)/ 땅이 기름지고 물도 부드러워 좋은 밭이 많았다네.(土膏水軟多良田·토고수연다량전)/ 붉은 삽살개 구름 보고 짖을 때 해는 저물고(紅尨吠雲白日晩·홍방폐운백일만)/ 떨어진 꽃잎이 땅에 가득하여 봄바람에 뒤집히네.(落花滿地春風顚·낙화만지춘풍전)/ 복숭아나무 심은 뒤에 홀연 고향 생각 끊어졌고(鄕心斗斷種桃後·향심두단종도후)/ 책을 불사르기 이전 세상의 일들만 말하였네.(世事只說焚書前·세사지설분서전)/ 앉아 풀과 나무를 보아 추위와 더위 알고(坐看草樹知寒暑·좌간초수지한서)/ 웃으며 어린아이 데리고 앞뒤를 잊었네.(笑領童孩忘後先·소령동해망후선)/ 어부가 한 번 보고 곧 배를 돌리니(漁人一見卽回棹·어인일견즉회도)/ 안개 낀 물결만 만고에 속절없이 아득하여라.(煙波萬古空蒼然·연파만고공창연)/ 그대 저 강남 마을 보지 못했는가(君不見江南村·군불견강남촌)/ 대나무가 지게문 되고 꽃이 울타리 되며(竹作戶花作藩·죽작호화작번)/ 실개울 맑은 물에는 찬 달이 어지럽고(淸流涓涓寒月漫·청류연연한월만)/ 고요한 푸른 나무에는 그윽한 새가 지저귀는 구나.(碧樹寂寂幽禽喧·벽수적적유금훤)/ 한스럽기는 백성들 생활이 날로 피폐한데(所恨居民産業日零落·소한거민산업일령락)/ 고을 아전들은 세미 받으러 항상 문을 두드린다네.(縣吏索米長敲門·현리색미장고문)/ 다만 바깥일로 와서 핍박하는 것만 없다면(但無外事來相逼·단무외사래상핍)/ 산촌은 곳곳마다 모두 도원일 텐데(山村處處皆桃源·산촌처처개도원)/ 이 시는 뜻이 있거니 그대는 버리지 말고(詩有味君莫棄·차시유미군막기)/ 고을 문헌에 적어 두었다가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하시게.(入郡譜傳兒孫·사입군보전아손)
위 시는 생몰연대가 불명이지만 고려 때 문장가인 이규보(1168-1241)와 동시대에 활동한 문신이지 문장가였던 진화( 陳澕)의 시 「도원가(桃源歌·도원을 노래하다)」로, 그의 유고집인 『매호유고(梅湖遺稿)』 등에 수록돼 있다.
위 시는 도연명(365~427)이 설정한 이상세계인 도원(桃園)이 바로 우리 마을이라 전제하고, 관리들이 가렴주구만 행하지 않으면 산골 마을 어느 곳이나 낙원이라 노래하고 있다. 고려 무신의 난 이후 황폐한 농촌 풍경을 표현한 작품이다. 칠언장시이지만 내용이 좋아 전문을 소개했다.
알다시피 무신난은 1170년(의종 24)에 문신 위주의 폐정에 반발하여 일어난 무신들의 정변이다. 정변이 성공함으로써 이후 100년 간 무신 집정자가 권력을 장악하는 무신 정권 시대가 시작되었다. 무신난이 발발한 12세기 후반 고려 의종 대는 오랜 기간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되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민생의 악화와 지배층 내의 분열이 심화되어 간 시기이다.
당시 고려는 1196년에 집권한 최충헌(1149~1219)이 장기집권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으며, 전국 각지에서는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의 주요 민란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198년에는 개성에서 만적의 난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에는 명주(溟州·현 강원도 강릉) 및 동경(東京·현 경북 경주)에서 도둑이 창궐해 주군(州郡)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다. 또한, 1200년에는 진주의 아전인 정방의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금주(金州·현 경남 김해)에서는 잡족인(雜族人)이 난을 일으켜 호족을 죽였으며, 경주에서는 최대의 등이 난을 일으켰다. 1202년에는 탐라(제주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경주에서는 별초군(別抄軍)이 난을 일으켰다.
그러다보니 고려는 건국 이래 최악의 상태를 맞이하고 있었다. 게다가 밖으로는 그동안 친교(親交)했던 북송(北宋)이 금(金)에게 망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남송(南宋)을 세우고 금과 대치하던 형국이었다. 금은 여진족 완안부의 추장 아구다가 지금의 만주·몽골·화베이(華北) 땅에 북송과 요를 무찌르고 1115년에 세운 나라(1234년 9대 120년 만에 몽골 제국에 망함)이다. 1206년에는 징기스칸이 몽고를 통일하며 강력하게 부상하는 등 동아시아의 세력판도가 북방의 이민족 위주로 전개되는 상황이었다.
첫 행 ‘丱角森森東海之蒼煙’은 진시황이 삼신산(三神山)에 불로초를 캐러 서시를 시켜서 처녀 총각 5백 명을 데리고 바다에 배를 태워 보냈더니 서시는 바다 섬에서 살고 돌아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둘째 행 ‘紫芝曄曄商山之翠巓’은 하황공(夏黃公) 등 네 사람이 진(秦)나라를 피하여 상산(商山)에 숨어 살면서 노래 짓기를 “빛나는 붉은 지초는 요기할만하도다(燁燁紫芝可以療飢·엽엽자지가이료기)”라고 하였는데, 그들을 곧 상산사호(商山四晧)라 부름을 말한다.
그러면 이번 글에서는 일반 독자들에게 생소한 진화가 누구인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의 출생연도에 대한 기록은 없다. 찾아보니 『고려사』에도 그에 대한 별도의 열전이 없는 것 같다. 다만 그의 문집인 『매호유고』에 있는 「매호공소전(梅湖公小傳)」에 따르면 1200년(신종 3)에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학계에서는 그의 출생연도를 1180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진화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명종이 신하들에게 「소상팔경(瀟湘八景)」 시를 짓도록 한 적이 있는데, 어린 나이로 장편을 지어 이인로와 더불어 절창이라는 평을 받았다. 1198년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200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하였다.
1215년(고종 2) 최충헌이 여러 신하를 불러 시 40여 운을 내었는데, 이규보에 이어 차석에 올랐다. 고려 고종 때 한림의 여러 유자들이 지은 경기체가인 「한림별곡(翰林別曲)」에서 ‘이정언(李正言·이규보) 진한림(陳翰林·진화) 쌍운주필(雙韻走筆)’이라고 할 정도로 이규보와 함께 글을 빨리 짓는 것으로 유명했다. 즉 이규보와 같은 반열의 문장가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조정의 고문대책(高文大冊·국왕의 명령에 따라 지은 외교 문서나 책봉문(冊封文) 같은 글)이 거의 진화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서장관(書狀官)으로 금(金)나라에 다녀왔다. 서장관은 중국으로 가는 외교사절단의 지휘부 ‘삼사신(三使臣)’ 가운데 한 관직으로, 사행 기간 동안 보고 들은 각종 외교 정보를 기록하여 국왕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맡은 직책이다. 그러므로 서장관은 대체로 문장에 뛰어난 사람을 임명한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진화는 시와 문장에 뛰어난 문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사행을 다녀온 뒤에 옥당(玉堂)으로 옮겨 지제고를 겸직하였다. 정언에서 보궐을 거쳐 우사간이 되어 지공주사에 보직되었다가 재직 중에 사망하였다.
그의 문집 『매호유고』는 목활자본 단책으로 1784년(정조 8)에 홍만종·남태보가 모은 유시(遺詩) 작품을 최수옹이 편집하고 15대손인 후(借)의 주도로 간행하였다. 문집에는 시 53수가 수록되어 있고, 부록으로 사실(事實)·수창(酬唱)·평품(評品)·예빈경공시(禮賓卿公詩)가 수록되어 있다. 이 시작품들은 역대 시화집 또는 시집에서 수습된 것이어서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문집에 있는 「봉사입금(奉使入金)」은 남송(南宋)이 위축되어 있고, 북쪽에서는 여진과 몽고가 번갈아 위세를 떨쳐 세상이 어수선함을 말하면서, “문명의 아침을 기다리노라면 동쪽 하늘에서 해가 붉어올 것이네(左待文明旦 天東日欲紅).”라고 읊어 문명국 고려에 대한 자부심과 기개를 드러내고 있다. 그의 문집은 2013년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13년에 번역되었다.
서거정은 『동인시화』에서 “진화의 칠언장구 시편들은 호방하고 준엄한 시풍을 띠고 있어 남다른 경지를 보이고 있다(陳右諫澕七言長句·진우간화칠언장구, 豪健峭壯·호건초장, 得之詭奇·득지궤기).”라고 그를 평하였다. 경기도 용인에 그의 묘가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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