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金吾)에서 김달순(金達淳)을 남해현(南海縣)의 절도(絶島)에 안치시킬 것으로 아뢰었다.”
위 글은 『순조실록』 8권, 순조 6년 1월 25일 계유 2번 째 기사이다. ‘금오(金吾)’는 조선시대 사법기관의 의금부를 말한다.
“금부도사(禁府都事) 강달수(康達秀)가 신지도(薪智島)의 가극(加棘) 죄인 김달순(金達淳)이 이달(4월) 13일 사사(賜死)되었다는 것을 아뢰었다.”
위 글은 『순조실록』 8권, 순조 6년 4월 20일 정유 5번 째 기사이다.
위 기사들은 무슨 내용일까? 기사에 나오는 김달순이 어떤 인물이며, 무슨 사건에 연루된 것일까? 이번 글에서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순조 시기인 1805년 12월 김달순(金達淳·1760∼1806)의 옥사가 일어난다. 김달순이 어떤 인물인지 간략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1789년(정조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영릉참봉이 되고, 이듬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다. 1801년(순조 1) 전라도관찰사, 1803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후 호조판서·우의정 등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의 5대손으로, 역시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의 동생인 김창흡의 현손이며, 순조의 장인인 영안부원군 김조순과는 10촌 형제간 이었다.
정조 시절 영남 사림들이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추숭(追崇)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이후 순조 5년(1805) 12월에 우의정 김달순이 그 상소를 할 당시 반대한 두 사람을 표창하자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들고 일어났다.
다시 말하자면 벽파(僻派)였던 김달순은 박치원(朴致遠·1680~1767) 등을 추증하라고 아뢰었다. 이 일로 김달순은 1806년 형조참판 조득영(趙得永) 등 시파(時派)로부터 정조의 유지에 위배된다는 공격을 받고, 유배를 가 사사되고 만다.
그런데 이때 『임원경제지』를 쓴 서유구의 숙부인 서형수가 김달순의 배후로 지목되어 귀양길에 올라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823년 전라도 임피현(臨陂縣·현 전북 군산시)으로 이배 돼 이듬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서형수가 유배되자 서유구는 순조 6년(1806) 1월 18일 상소를 올려 당시 맡고 있던 홍문관 부제학을 자진해서 사퇴했다. 즉 작은 아버지 서형수가 김달순 옥사에 연루되면서 서유구의 집안은 몰락했고, 서유구도 관직에서 물러난 것이다.
여하튼 김달순의 옥사에 대하여 좀 더 상세하게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김달순은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안동 김씨였지만 시파가 아니라 벽파였다. 그 이유는 그가 정승에 올랐던 것은 벽파의 거두 김관주(金觀柱·1743~1806)의 후원 덕분이었다. 당시 벽파의 후견자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1745~1805)였다. 그녀는 영조비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죽자 1759년(영조 35) 15세로 51세 연상인 영조와 결혼하여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녀는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정순왕후는 1800년 순조가 11세에 즉위하자 신료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는데,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였다.
정순왕후는 노론 벽파계 집안 출신으로, 국혼 후 오빠 김귀주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했다.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고 순조가 11세에 즉위하자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했다. 수렴청정 중에 노론 벽파 심환지를 영의정에 임명한 후 정조의 측근들을 내치고 신유사옥으로 남인(南人) 청류들을 대거 숙청함으로써 정조 재위기의 개혁 정치를 원점으로 되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조대 진출이 활발했던 남인 청류들을 신유사옥과 연관 지어 처벌하였다. 신유사옥은 남인들의 다수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정조대에 입지가 강화된 남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김관주는 순조 즉위 후 벽파의 득세와 함께 예조 판서로 발탁되었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우의정이 되었다. 하지만 벽파의 후견자였던 정순왕후가 1805년에 죽게 된다. 그러자 순조가 장성하면 벽파에 대한 정치보복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순조가 장성하기 전에 사도세자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해두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조카 박종경과 함께 의논해 거기에 김달순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박종경과 김달순 두 사람을 입궐케 하여 순조에게 사도세자 문제를 아뢰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입궐날짜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종경의 아버지 박준원이 아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아들을 방에 감금해 버렸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김달순은 박종경이 순조를 만났을 것으로 생각하고 순조를 알현했다. 그리고 사도세자를 항상 두둔해온 영남만인소의 주모자 이우를 처벌하고, 사도세자로 하여금 잘못을 시인하게 했던 박치원과 윤재겸에게 벼슬과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했다. 순조는 가부를 바로 결정하지 못하다 1806년 1월 두 사람에게 벼슬과 시호를 내릴 수 없다며 다시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했다.
그런데 그 후, 이 문제를 놓고 평소 그와 정적관계에 있던 김명순이 개입해 김달순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같은 안동 김씨 출신이었지만 각기 벽파와 시파로 갈라져 있었다. 김명순은 형조참판 조득영에게 김달순을 탄핵하게 했다. 이어 대사간 신헌조도 김달순의 죄를 계속 문제 삼고, 삼사에서도 합동으로 순조에게 거듭 죄줄 것을 청해 김달순은 중도부처의 형에 처해졌다. 이에 김달순은 경상도 남해현의 한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전라도 신지도로 옮겨졌고 1806년 4월 13일에 사사되었다.
이런 김달순의 옥사로 인해 벽파는 시파에게 정치적인 철퇴를 맞았다. 조득영의 김달순 공격으로 김달순이 사사되면서 김관주·심환지·김일주·정일환 등 벽파의 핵심인사들도 권력에서 밀려났다.
1802년(순조 2) 10월 시파인 김조순의 딸이 순조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되면서 그때부터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김조순은 시벽의 당파나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척족 세력들이 후일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김조순의 일족인 김달순·문순·희순·유근·교근 등이 정승·판서를 독차지하면서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후 이들 일문에서는 영의정 김좌근·흥근·병학·병국·병시, 호위대장 김조근(헌종의 장인), 판서 김수근·보근·병기·병주·병덕·병지·병교 등을 배출하였다.
결국 김달순 옥사로 인해 시파 정권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세력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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