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20년(1371) 신해 2월에 한천이 경상도도순문사가 되었고, 공양왕 3년(1391) 신미에 판개성부사가 되었다. 공양왕 4년 임신 7월에 공양왕이 원주로 쫓겨갔다. 단성군 우성범과 진원군 강회계가 참살되고, 대제학 한천은 탐라(제주)로 유배되었다.
… 恭愍王二十年辛亥二月, 以韓蕆爲慶尙道都巡問使, 恭讓王三年辛未, 判開城府事, 四年壬申七月, 王遜于原州, 斬丹陽君禹成範晋原君姜淮季, 流大提學韓蕆于耽羅者, …( … 공민왕이십년신해이월, 이한천위경상도도순문사, 공양왕삼년신미, 판개성부사, 사년임신칠월, 왕손우원주, 참단양군우성범진원군강준계, 유대제학한천우탐라자, …)
위 문장은 조선말인 고종 10년(1873년) 제주에 귀양 갔던 면암 최익현(崔益鉉·1833~1907) 선생이 고려 때 대제학을 역임한 한천(韓蕆)의 적거지에 유허비문(遺墟碑文)을 썼는데, 그 중 일부분이다.
1873년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면암 최익현이 유배에서 풀리자 한라산에 올랐다가 하산 길에 한천의 유허지를 둘러보았다. 그는 한천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높이 기려 자신의 『유한라산기』에 한천에 대한 내용을 적어놓았다. 한천의 후손들이 위 내용을 뽑아 비에 새겨 세운 것이다. 한동안 충의사 건물 안에 보관돼 있었으나, 2006년 밖으로 내놓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恕齋韓公諱蕆遺墟碑(서재한공위천유허비)’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한천에 대한 긴 문장이 새겨져 있다.(비문 전체 내용 지면관계로 생략)
자, 그러면 조선시대에 최초로 제주도에 유배 간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바로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한천(韓蕆·정확한 생몰년 미상)이다.
그는 본관이 청주로 고려말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고, 공양왕 3년에는 판개성부사가 됐다. 1392년 7월 고려 공민왕이 원주로 내쫓기자 왕의 사위인 단양군 우성범, 진원군 강회계 등과 함께 이성계의 제거를 모의하다가 발각됐다. 우성범과 강회계는 바로 참형을 당했다. 하지만 한천은 종질인 한상경의 도움으로 목숨만을 간신히 건져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리하여 그가 조선시대 최초로 제주도에 유배된 것이다. 그는 지금의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加時里)에서 유배 살면서 인근의 자제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지금 가시리 상동에 한천을 모시는 사당이 세워져 있다.
『고려사』 열전 등을 통해 살펴보면 한천의 가계는 고조부 한강(韓康), 증조부 한사기(韓謝奇), 조부 한악(韓渥), 부친 한대순(韓大淳)으로 전한다. 한천은 공신의 가문이자, 누대에 걸친 명문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 및 숙부, 종제 등은 가정 이곡 및 목은 이색 등 신진사대부를 이끌었던 당대의 유학자와 교류가 깊었다.
한천은 이미 30대 중반에는 조정의 정3품 당상관 반열에 올랐으며, 국시(國試)를 주재할 정도의 권위 있는 학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371년(공민왕 20) 2월 경상도도순문사로 제수되었다. 1374년(공민왕 23) 9월에 공민왕 시해사건이 발생하고, 2년 뒤인 1376년(우왕 2) 12월에 이 문제가 재론되었다. 이때 한천도 정확한 지명은 알 수 없지만 먼 고을로 유배되었다. 이후 1391년(공양왕 3) 12월 한천은 판개성부사로 등용됐다.
하지만 1년 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될 때 한천은 예문관대제학으로 유배를 당했다. 한천이 유배된 곳이 어디인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한천이 이때 제주도로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제주 입도 사실을 전하는 자료로는 면암 최익현의 「서재한공유허비」와 김봉현(金奉鉉)의 『제주도유인전(濟州島流人傳)』 등이 있다.
최익현의 서재한공유허비는 1879년(고종 16) 음력 8월 기술하였으며, 김봉현의 제주도유인전은 1956년 일본에서 간행되었다. 두 자료 모두 한천이 제주도로 간 시점은 1392년(공양왕 4) 7월 유배될 때라고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한천이 제주도에 들어간 시기는 고려왕조의 멸망과 때를 같이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 홍기표는 논문 「여말선초 청주한씨 제주입도조(濟州入島祖) 한천(韓蕆) 재조명」에서 이러한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했다. 그는 ‘한천의 입도 시기가 1392년 유배당할 때인지, 아니면 1년 뒤 유배가 풀리고 일정 시점이 지난 뒤에 유망인의 형태로 입도했는지의 문제이다. 후자의 가능성이 큰데, 이유는 조선 개국 후에도 그의 관력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한천의 제주 입도를 1392년이 아닌 1400년 이후에서 1403년 사이로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한 분석이 아닐까 추정한다.’라고 했다. 또한 현재까지 한천의 정확한 생몰년이 알려져 있지 않는데, 홍기표는 ‘1330년이 한천의 태어난 해로, 죽은 해는 1400년~1403년으로 볼 수 있다.’라고도 했다.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에는 ‘1391년(공양왕 3) 판개성부사가 되었고,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공양왕의 사위이던 단양군 우성범과 이성계 제거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393년(태조 2) 태조가 고려왕조 대신 71명을 포상하라는 명을 내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1400년(정종 2) 권희 등과 함께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 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정착하여 청주 한씨의 제주 입도조가 되었다.’라고 적혀있다.
여하튼 한천의 제주 입도시기에 대해선 학계에서 좀 더 고증해 정확하게 밝혀낼 일이지만, 현재까지는 대체적으로 1392년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제주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에는 그의 묘소가 있다. 1955년 발견되어 현재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2385-1번지에 있으며, 2003년 8월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60-2호 ‘가시리 설오름 청주한씨 방묘’로 지정되었다.
어쨌든 한천 이후로 조선시대에 200여 명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대표적인 인물이 추사 김정희와 우암 송시열, 면암 최익현 등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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