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伯仲)이 함께 오다가 둘째만 홀로 돌아가니(伯仲同來仲獨歸·백중동래중독귀)
장차 어머님께 무슨 말로 아뢸 수 있을까.(欲將何語報慈闈·욕장하어보자위)
두견새 울음소리 청산을 찢는데(啼鵑一□靑山裂·제견일□청산렬)
눈물 젖은 색동옷 며칠이 가도 마를 줄 모르네.(淚濕班衣幾日晞·루습반의기일희)
위의 시는 조선조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오시수(吳始壽·1632~1681)의 시 「포천별이중(抱川別二仲)」으로, 그의 문집인 『수촌집(水邨集)』 권2의 시(詩)에 실려 있다. 셋째 행의 네 번째 글자가 한국문집총간에도 결실돼 있다.
오시수가 경기도 포천에서 이중(二仲·둘째 형님)과 작별하면서 지은 칠언 절구이다. ‘백중(伯仲)’은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을 말한다. 위 시에서는 둘째 형님을 가리킨다. ‘반의(班衣)’는 자식의 효성을 뜻한다. 초(楚)나라의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칠십에도 색동옷(班衣)을 입고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한데서 유래됐다.
큰 형님과 둘째 형님, 그리고 오시수 이렇게 3형제가 함께 여정에 올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위 시에서 보듯 포천에서 둘째 형님이 집으로 돌아가게 된 상황이 생겼던 것 같다. 그리하여 둘째 형님과 헤어지면서 어머님을 걱정하는 마음까지 시에 담고 있다.
오시수는 남인(南人) 중 서인(西人) 세력의 처벌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보인 탁남(濁南) 계열의 재상이었다. 탁남은 청남(淸南)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조선후기 숙종 초 남인 내에서 분파된 세력의 하나이다.
우의정 오시수는 1680년(숙종 6) 집권 세력인 남인이 정계에서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에 연루되어 1681년(숙종 7) 6월에 사사되었다.
그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오시수의 자는 덕이(德而), 호는 수촌(水邨), 본관은 동복(同福·전남 화순군)이다. 관찰사 오백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오단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오정원이다. 어머니는 좌참찬 윤의립의 딸이다.
그는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효종 7) 별시 문과에 병과로 합격한 후 효종과 숙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평안도관찰사·강화부유수·도승지·이조판서 등 주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679년(숙종 5) 48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었다.
그가 사사된 이유에 대해서 좀 더 들여다보자.
1674년(숙종 즉위년) 8월 현종이 세상을 떠나고 숙종이 즉위하였다. 이때 청나라에서 세상을 버린 현종을 위하여 조문사(弔問使)를 보내고, 새로 임금이 된 15세의 숙종을 위하여 책봉사(冊封使)를 보냈다. 그런데 당시 정권을 잡은 남인 출신의 승정원 도승지 오시수가 원접사로서 청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면서 의주까지 먼 길을 오가다가, 청나라 사신들에게 “선왕 현종은 약하고 신하 송시열은 강하여 신권이 왕권을 제압하였다”는 이른바 ‘왕약신강설’을 사적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이를 이유로 오시수는 1680년 경신환국(경신대출척)으로 서인들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탄핵받고 사사됐다. 후일 서인인 김수항은 남인이 권력을 잡자 오시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유배지 진도에서 사사되었다. 조지겸(1639~1685)은 김수항에게 오시수를 변호하다가 힐책을 당하기도 했다. 김수항이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의정 오시수를 처형했다.
숙종이 즉위하였을 때 윤계(1622~1692)는 황해도관찰사로 있었는데, 오시수가 ‘왕약신강설’을 했다고 거듭 상소해 ‘오시수가 전혀 없는 말을 날조하였다’며 힐난했다.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잡자 남인인 허적과 윤휴 등이 오시수의 그런 상황을 상소한 윤계를 심문한 후 “이것은 서인 윤계가 꾸며낸 말”이라고 숙종에게 보고했다. 당시 허적은 윤계의 파직만을 주장하였으나, 윤휴는 윤계를 유배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숙종은 마침내 윤계를 함경도 경성으로 유배시켰다. 윤계는 벼슬살이를 하면서 여러 관직에서 공적을 쌓았으나, 1689년 기사환국(1689년 남인이 희빈장씨의 소생인 원자 정호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 때 송시열의 일당으로 몰려 전남 강진에 귀양가서 죽었다.
세상일은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게 쉽지 않을 때가 많다. 이쪽에서 보면 이것이 맞고, 다른 쪽에서 보면 다른 것이 맞는 경우가 많다.
여하튼 오시수는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당시 관작을 회복하게 되지만,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 세력이 재집권하면서 관직을 추탈 당했다. 그러다 1784년(정조 8)에 관작이 다시 회복되었다. 그는 사후에 환국을 거칠 때마다 관작이 회복되었다 추탈되었다 하는 곡절까지 겪은 것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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