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시기인 1591년 이산해(李山海·1539~1609)는 일반인들에게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은 문학인으로 잘 알려진 정철(1536~1593)을 탄핵시켜 평안도 강계로 유배시켰다. 이와 관련해 서인(西人)인 호조판서 윤두수와 우찬성 윤근수, 백유성·유공진·이춘영·황혁 등을 역시 파직시키거나 유배 보냈다. 이처럼 서인의 영수급을 파직 또는 귀양 보냄으로써 동인(東人)의 집권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면 어떤 문제로 정철과 윤두수 등을 탄핵해 유배 보낸 것일까?
먼저 정철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정철은 고향이 창평(昌平·현 전라남도 담양)으로, 기대승·김인후·양응정의 문하였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되었고, 이후 3년 동안 전라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시를 많이 지었다. 이 때 「관동별곡」을 지었고, 또 시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1585년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작품 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 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89년 그는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었다. 정철은 당시 서인의 영수로서 동인 세력을 가혹하게 숙청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590년 좌의정에 올랐다. 1591년 선조에게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건의를 했다. 선조는 이에 노여워했다. 당시 선조는 인빈 김씨에게 빠져 있었으며,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 때문에 정철은 파직되고, 진주로 유배되었다. 이어 강계로 이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윤두수는 정철이 화를 당할 때 같은 서인으로 연루되어 함경도 회령에 유배되었고, 그의 동생 윤근수는 삭탈관직 되었다.
정철이 자행한 기축옥사(己丑獄事)로 피해를 입은 동인들이 이산해를 중심으로 반격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알다시피 기축옥사는 1589년에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의 인물들이 모반의 혐의로 박해를 받은 사건을 일컫는다. 기축년(己丑年)인 1589년 정여립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告變)에서 시작해 그 뒤 1591년까지 그와 연루된 수많은 동인의 인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동인과 서인의 대립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정여립의 사건과 관련된 국문(鞠問)은 3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동인 1,000여 명이 화를 입었으며,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산해는 정철이 이 사건을 빙자하여 무고한 선비들을 많이 죽인 것에 대해서 극히 분개하였다. 특히 남명 조식의 문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조식의 제자인 최영경은 역모의 또 다른 괴수로 인식된 길삼봉(吉三峯)으로 몰려 옥사(獄死)를 당하기도 했다. 서인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산해와 유성룡도 정여립 사건과 연루된 것으로 몰아가려 했다. 서인들의 지나친 세력 확대에 반발한 선조가 정철을 파직함으로써 기축년에 시작된 옥사(獄事)가 마무리되었다.
정치적인 문제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이산해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영의정까지 지냈지만 상대적으로 이산해는 덜 알려진 편이다. 본관이 한산(韓山)인 그는 고려 말 유학자인 목은 이색의 7대손이다. 이산해의 고조부이자 이색의 증손자인 이우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와 사촌 관계이다.
이산하의 아버지 이지번은 청풍현감을 지냈고,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이지함이 숙부이다.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이다. 이산해의 둘째 딸이 이덕형의 부인이었다.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산해는 글씨 또한 잘 써 명종이 홍문관정자인 그에게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쓰게 했다.
선조 즉위년인 1567년 원접사종사관(遠接使從事官)으로 명나라 조사(詔使)를 맞이하였으며,
1578년 대사간, 다음 해 대사헌으로 승진하고 1580년 병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581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오르고, 다시 이조·예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제학·대제학·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1588년 우의정에 올랐고, 이 무렵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북인의 영수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1589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며,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아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종계변무는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이임인(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 이산해는 선조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서인의 중심인 정철의 측근들이 서울을 떠난 죄를 물어 이산해를 공격하였다. 대간의 탄핵이 더욱 격렬해지자 선조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산해는 좌의정 류성룡, 우의정 이양원과 함께 파직되었다. 이산해는 평해로 유배 갔다. 영의정은 최흥원, 좌의정은 윤두수, 우의정은 유홍이 임명되었다. 이산해는 이후 다시 복귀했다.
1608년 2월 선조가 사망하였다. 이산해는 선조 왕릉의 지문(誌文·죽은 사람의 행적 따위를 적은 글)을 지어 올렸다. 이듬해인 1609년 3월 이후 이산해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8월 23일 장통방(長通坊) 집에서 72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이산해는 실용을 중시한 관료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조선시대 인물사 연구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관료학자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정치적으로 패배한 당파인 북인의 영수였다는 점 또한 그에 대한 관심이 적은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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