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목압마을에 소재한 목압서사는 매달 주민들을 위해 ‘외부인사 초청 인문학 특강’을 갖고 있다. ‘2022년 7월 특강’은 22일 오후 6시 30분에 동양학의 최고수라고 불리는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가 ‘내가 아는 지리산’을 주제로 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오랫동안 글을 쓰고 있는 조 교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명사로 손꼽힌다. 글을 쓰기 위해 전국 곳곳을 답사하기도 하지만, 특강 일정으로도 바쁘기 때문이다.
아무 곳에서나 쉽사리 특강을 하지 않는다고 소문난 그가 지리산 중에서 가장 깊은 골짝인 화개골의 목압서사에서 지리산 주민들을 만난 것이다.
이날 좁고 누추한 인문학 공부 공간인 목압서사 연빙재에 30석의 좌석을 마련했는데, 강의 시작 전에 다 차버렸다. 강의는 정확하게 6시 30분에 시작됐다.
그는 “제가 일방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여러분의 질문을 받고 거기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하는 게 좋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날 △지리산은 우리나라에서 지정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 △청학동은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지리산에서 머리를 깎은 서산대사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지리산의 기운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 여러 질문이 이어졌다.
지면 관계상 조 교수의 특강 내용을 몇 가지로 묶어 간략하게 정리하겠다.
첫째, 지리산은 기운이 좋은 곳이다. 이곳 화개골을 비롯해 뱀사골, 피아골, 백무동계곡, 대원사계곡 등 골짜기와 계곡이 많다. 풍수상으로도 좋은 곳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산청 중산리 위쪽의 법계사에서 좋운 기운을 많이 받았다. 지리산 곳곳을 다니다보면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악양의 형제봉도 기운이 좋다. 이런 사례가 있다. 내가 아는 한 정부기업 고위직이 형제봉에 집을 하나 얻으려고 했다. 직장에서의 스테레스를 풀고자 함이었다. 부인이 반대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사주를 보니 명이 끝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부인을 설득해 그곳에 집을 얻도록 했다. 이후 그 사람이 남미에 댐 건설 관계로 출장이 잡혔다. 하지만 형제봉에 얻은 집수리 관계로 과장급 몇 명을 대신 출장 보냈다. 그런데 출장 갔던 그 사람들이 헬기 추락으로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사망한 분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 국장은 형제봉에 집을 얻은 덕분에 명을 이은 것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시기까지 그 많은 유학자들이 지리산을 찾은 것도 기운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지리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지리산에서 후학들을 많이 길러낸 남명 조식의 경우 학문적으로 후학들이 퇴계학맥처럼 뚜렷하게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의병활동이나 일제시기 독립운동 등 실천적으로 이어진 면이 크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은 천왕봉을 두고 ‘남명의 천왕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남명은 10번 이상 천왕봉에 오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지리산의 좋은 기운을 받으려면 사람이 맑아야 한다. 술과 고기를 많이 먹으면 기가 탁해져 좋은 기운, 소위 ‘영(靈)빨’이 잘 안 들어온다. 풍수나 명리, 주역으로 볼 때도 그렇다.
둘째, 지리산은 조선 중기에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진 비밀 결사인 당취(黨聚)의 본부가 있던 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취의 어원이 잘못 변해서 소위 ‘땡추’, ‘땡초’로 불리고 있다. 서산대사님은 도가 높은 스님이었다. 승려가 되기 전 성균관에서 공부한 유생이었기도 하지만 부활된 승과에 합격한 문재(文才)였다. 서산은 알다시피 이 화개골에서 수행하던 고승인 부용 영관(芙蓉靈觀·1485~1571)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지 않았는가? 영관 스님이 서산의 영적인 기운을 보고 머리를 깎게 했던 것이다. 서산이 지리산에서 금강산, 묘향산으로 옮겨 다녔다. 그것은 수행과 승병(僧兵) 등의 일에 따른 것도 있겠지만, 당취의 조직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선조임금이 그를 승병의 총사령관으로 앉힌 것도 승병, 또는 당취와 관련이 있다고 봤을 것이다. 서산은 당취의 최고 우두머리였다. 목압서사 위쪽 단천마을 올라가는 계곡에 있는 ‘바위문자’도 서산과 당취의 관계를 역설적으로 함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청학동은 좁은 의미로는 쌍계사 위쪽 불일폭포를 포함한 일대를 생각한다. 먼저 청학동은 청학(靑鶴)이 사는 선계, 즉 길지(吉地)의 의미이다. 외부의 침략을 받지 않을 만큼 험하고 깊숙한 곳이어야 하고, 어느 정도 먹을 양식을 생산할 땅이 있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불일폭포 인근에 불일평전이라고 사람들이 농사를 짓던 땅이 있다. 옛 선비들이 청학동을 찾아 쌍계사와 불일폭포에 오지 않았던가? 넓은 의미의 청학동을 생각한다면 악양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악양은 높은 봉우리들이 있는 데다 너른 들판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1시간가량 강의를 할 예정이었으나 질문이 이어져 30분 정도 더 연장됐다. 그는 또 ‘지리산에도 귀촌한 사람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있는데, 이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금방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갈등이 있어야 사람들이 발전적으로 진보한다.”라고 답했다.
특강이 끝나자 조 교수의 책을 들고 온 수강생들이 저자 시인을 받으려고 줄을 섰다. 그는 『조용헌의 방외지사 열전』 1·2,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조용헌의 고수기행』, 『조용헌의 백가기행』 1·2,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1·2, 『조용헌의 휴휴명당』, 『조용헌의 명문가』, 『조용헌의 도사열전』, 『조용헌의 영지순례』· 『조용헌의 사찰기행』 외 수많은 책을 발간했다.
그는 특강 후 연빙재에서 수강생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밤늦게까지 또 이야기를 이어갔다.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함양으로 출발했다. 목압서사에 특강을 온 김에 다음날 일찍 함양에서 벽소령으로 올라가 답사를 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조 교수가 출발한 후에도 몇몇 수강생은 특강의 여운을 떨쳐버리지 못해 아쉬워하며 목압서사를 바로 떠나지 못했다.
한 수강생은 “조용헌 선생님의 책을 몇 권 읽었다. 평소에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지리산 이 깊은 골짜기까지 오시어 강의를 해 주실 줄은 몰랐다. 꿈만 같았다.”라고 말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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