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탓에 공식적으로 3년 만에 회동(?)을 한 것 같다. 대학 때 함께 시문학회 활동을 한 ‘영대글벗문학회’의 영원한 문청(文靑)들이 9~10일 대구에서 만났다. 2019년 11월 16~17일 지리산 산중의 전북 남원시 산내면 등구재에 있는 한 민박집에서 회동한 이후 처음이다. 물론 그동안 개별적으로, 또는 몇몇이 조심스럽게 산발적으로 만나기는 했다.
영대글벗문학회 황근희 회장과 박재범 총무에 따르면 이기철 교수님도 참석하신다고 했다. 9일 오후 1시에 대구 서부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다. 필자가 서부터미널에 도착하는 시간이 그 때 즈음이어서 일찍 도착하는 멤버들이 배려해 시간과 장소를 맞춘 것이다. 공식적인 모임은 9일 오후 7시 수성구 달구벌대로 2341의 ‘싱싱해 싱싱어’ 횟집에서 갖는 걸로 예정돼 있다.
아침 7시 반 경에 필자가 사는 목압마을 버스정류소에서 화개공용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탔다. 화개에서 내려 터미널 옆의 ‘쉼표하나 카페’가 문을 열어 놓았기에 커피를 한 잔 마셨다. 화개터미널에서 진주행 버스가 8시 15분에 출발해 시간 여유가 좀 있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버스를 탔다. 하동버스공용터미널에 이르니 8시 50분이었다. 버스 기사님이 “9시 40분에 출발합니다.”라고 했다. 하동터미널에서 50분을 쉬었다 진주로 출발했다.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10시 40분께였다. 진주에서 대구 서부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하루에 몇 대 없다. 10시 50분에 출발하는 버스가 서부터미널로 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합천까지만 간다고 했다. 서부터미널로 가는 버스는 낮12시 10분에 있었다. 합천에 가면 서부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좀 있을 것 같아 일단 10시 50분 버스를 탔다. 진주서 서부터미널로 가는 버스는 어차피 합천을 거쳐서 간다.
버스는 합천 쌍백 정류소와 대영 정류소를 거쳐 합천공용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1시간 10분가량 걸렸다. 그런데 합천과 서부터미널을 오가는 별도의 버스는 없었다. 필자가 대학 시절 서부터미널에서 합천으로 가는 버스를 탔던 기억이 있었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진주서 12시 50분에 출발하는 그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합천은 진주와 대구 간 중간 경유 터미널이어서 진주서 오는 버스 좌석에 여유가 있거나, 예매했다가 취소하는 손님이 있을 경우 탈 수 있다고 했다. 그것도 12시 30분 돼야 알 수 있다고 매표 직원이 설명했다. 난감했다. 박 총무에게 전화를 했다. “약속했던 오후 1시까지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요. 잘해야 1시 50분경에 서부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나를 빼고 그대로 진행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12시 30분쯤에 다시 전화 할게요”라고 전화를 했다.
매표 직원이 창구를 통해 필자를 볼 수 있는 직선거리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낮12시 30분이 조금 넘으니 “이리 오세요, 표 끊으세요.”라고 말했다. 다행히 자리가 생긴 모양이었다. 표를 구입한 후 다시 박 총무에게 전화를 했다. “오후 1시 50분께에 서부터미널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박 총무는 “도착해 전화 다시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미안했다. 원래 계획은 경기도 광명시에서 오는 송담(松潭) 박주동(朴柱東) 형과 구미서 오는 도재(陶齋) 황근희 회장 등과 현풍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비슬산에 있는 사찰인 대견사에 가기로 돼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해 전화를 하니 박 총무는 “택시를 타고 두류공원 제1주차장으로 오세요.”라고 말했다. 황 회장과 박 총무, 구미 현일고등학교 교감인 유인식 형과 부인이자 문학회 멤버인 인 서명아 선생, 박주동 형이 점심 식사로 국수를 먹은 후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 때문에 원래 계획이 어긋난 것이었다.
“계획을 바꿔 육신사(六臣祠)로 가기로 했습니다.”라고, 박 총무가 말했다. 광명에서 차를 몰고 온 박주동 형의 차에 합승해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소재한 육신사로 갔다. 육신사는 단종 복위를 꾀하다 역적으로 몰려 참혹한 최후를 맞은 사육신 중의 한 분인 박팽년(朴彭年·1417~1456) 선생을 포함해 나머지 다섯 분인 하위지·이개·성삼문·유성원·유응부 선생을 모시는 곳이다.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朴壹珊·1456~?) 선생이 이곳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해 이루어진 마을로, 육신사의 몇 개 건물을 중심으로 주변에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9선 의원으로 국회의장을 지낸 박준규 씨가 대표적인 후손이다.
이곳의 태고정은 박일산 선생이 건립한 건물로 보물 제554호로 지정돼 있다. 당시 사육신은 모두 멸문지화를 당했는데, 박팽년 선생이 대를 이은 것에 대해서는 영화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역적의 가족이라 하여 이조판서인 박팽년 선생의 부친 박중림을 비롯한 동생 인년·대년·연년 4형제와 아들 헌(憲)·순(珣)·분(奮) 3형제 등 남자 9명은 극형에 처해졌다. 부인들은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가거나 관비가 되었다. 이때 임신한 둘째 며느리가 대구 관비로 갔는데, 마침 그녀의 여종도 임신을 한 상태였다. 세조는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삼으라는 어명을 내렸다. 며느리는 아들을, 여종은 딸을 낳았는데 서로 바꿔치기를 해 손자인 박일산을 노비로 위장해 묘골의 외조부 손에서 키웠다고 한다. 이렇게 박팽년 선생의 가문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고정 옆 건물에 앉아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한참동안 앉아 육신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일행은 여기서 나와 공장을 리모델링한 카페에 가 커피를 마신 후 약속 장소인 수성구 횟집으로 갔다. 간전(澗田) 이정희 형은 광명시에서, 이희철 형은 부산에서, 곽종규 형은 김포시에서 와 있었다. 박 총무의 아내이자 문학회 멤버인 곽효수도 와 있었다.
함께 횟집에 앉아 서로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들을 하는 가운데 이기철 교수님이 도착하셨다. 이 교수님께서 경북 청도에서 운영하시는 시인학교인 여원예향의 수업이 있는 날이어서 수업을 마치고 오신 것이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오규용 시인과 김태신 시인이 동행했다. 서울역에서 곽종규와 오기식 형이 함께 오려고 만났는데, 오기식이 계단을 걷다 허리를 삐끗해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최근에 교통사고가 나 허리 상태가 좋지 않은데다 이날 허리를 삐끗해 “모임에 참석하면 민폐만 끼칠 것 같다.”며 귀가했다고, 곽종규가 사정 이야기를 했다. 모임 중 우리 일행은 오기식과 돌아가면서 통화를 했다.
횟집에서 식사와 술을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에 이 교수님이 최근 발간한 시집 『저 꽃이 지는데 왜 내가 아픈지』(문예바다)에 서명을 하시어 제자인 우리들에게 한 권씩 주셨다. 이어 김태신 시인도 최근에 발간한 시집 『백지에 물들다』(시선사)를 한 권씩 나눠 주었다. 필자도 박 총무의 요청으로 지난 해 발간한 시집 『차솥을 씻으며』(푸른별)를 가져갔으므로, 각자에게 나눠줬다. 다들 시를 쓰는 시인들이어서 이날 모임에 3권의 시집이 선물로 나왔다. 유인식·서명아 부부는 “친구의 부친이 별세하시어 영천의 장례식장에 문상을 가야한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일행은 횟집에서 나와 숙소가 있는 동촌유원지에 있는 한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산에서 가게 영업을 마치고 올라온 옥수찬 부부가 기다리고 있어 합류했다. 이곳에서 이 교수님은 “나는 자네들과 연락 하는 게 가장 기쁘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자네들은 꾸준히 만나 우정을 다져라”고 당부를 하셨다. 김태신 시인은 “내년에 여원예향에서 공부하는 제자들 중심으로 이 교수님 팔순 기념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영대글벗문학회 여러분도 동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김 시인은 나이는 우리보다 위이지만 대학은 후배라고 했다. 박 총무의 사회로 우리는 각자 노래를 한 곡씩 불렀다.
그곳을 나와 이 교수님을 비롯해 함께 오신 오규용 시인과 김태신은 택시를 타고 가셨다. 이제 문학회 멤버인 우리만 남았다. 인근에 있는 24시간 감자탕 전문 식당으로 갔다. 이 식당에서 우리는 묵은지감자탕 등을 시켜 먹으며,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다들 할 이야기가 어찌도 그렇게 많은지 끝이 없었다. 새벽 2시쯤 돼 식당에서 나와 옥수찬 부부는 부산으로 차를 몰고 내려갔다. 남은 우리는 숙소에 들어갔다. 박 총무가 방 2개를 예약해놓았다. 3층에 있는 방에 이희철과 곽종규, 그리고 필자가, 7층의 방에 황근희·박주동·이정희·박재범이 잤다. 아침 6시쯤에 이희철이 먼저 부산으로 내려갔다. 곽종규가 “이희철이 교회 장로님인지라 아마 교회 일이 있는 모양”이라고 설명했다.
남은 우리는 오전 8시 반쯤에 아침을 먹기 위해 황금동에 있는 ‘섬진강 재첩국’ 식당‘으로 갔다. 재첩국과 재첩국우거지를 시켜 먹었다. 필자는 재첩국우거지를 먹었는데, 맛이 좋았다. 밑반찬도 좋았다. 서글서글한 성격의 주인아주머니는 “이 식당은 25년쯤 됐다. 예전에는 대구에 재첩국 식당이 많았는데, 이제 우리 식당만 남았다”라고 말했다.
밥을 먹은 후 박주동의 차를 타고 박 총무와 필자는 복현동 박 총무의 아파트 앞에서 내렸다. 박 총무의 아파트에서 그의 차에 동승했다. 그는 “서부터미널까지 태워 드리겠습니다. 커피도 한 잔 하고요.”라고 말했다. 서부터미널 인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필자는 너절한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필자는 오전 11시 37분 남원행 버스를 타야했다. 박 총무는 “오늘 장모님 생신이어서 장인·장모님을 모시고 점심 때 장어를 먹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필자를 터미널에 내려주고, 아내를 태우러 집으로 떠났다.
서부터미널에서 난생 처음 대구에서 남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남원까지 1시간 30분이 걸렸다. 남원버스터미널에서 구례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곡성버스터미널을 거쳐 구례에 도착했다. 1시간이 소요됐다. 구례버스터미널에서 2시30분에 화개 신흥행 버스를 갈아타고 집으로 갔다. 진주를 거쳐 대구 서부터미널로 가는 것보다, 남원을 경유하는 게 시간과 경비면에서 절약이 됐다. 이렇게 해 1박2일의 영대글벗문학회 만남은 마무리 되었다. 각자 잘 도착했다고 단톡방에 글이 올라왔다. 이정희와 박주동은 곽종규와 함께 김포에서 점심으로 맛있는 간장게장을 먹고 있다고 했다. 김포 시장에 출마했던 곽종규가 사주어 맛있게 먹고 있다고 사진과 함께 카톡에 올렸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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