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인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1399~1456)가 사육신(死六臣)인가 하는 문제는 지금도 가끔 일부 학자들에 의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김문기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김문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문집인 『추강집(秋江集)』에 실린 「육신전(六臣傳)」에 대해 잠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문집 권8에 사육신의 전기가 실려 있다.
사육신과 달리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남효온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굉필·정여창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그는 「육신전」에서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순으로 한 사람씩 전(傳·한 사람의 평생 발자취)을 기록한 뒤에 마지막에 찬(贊·행적을 기리는 글)을 붙였다. 그리하여 사육신 각 인물의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일화가 곁들여져 있다.
남효온은 당시 금기에 속한 이들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던 것이다. 그와 가까운 문인들이 “이들 육신을 들먹이면 장차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다”라며, 두려워 말렸다, 하지만 남효온은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라고 하며, 이들 6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펴냈다. 아니나 다를까 남효온은 1504년 갑자사화 때 소릉 복위를 상소한 것이 빌미가 돼 이미 죽어 무덤에 있는 그의 시신의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말았다. 그는 세조에 의해 폐서인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신원을 복권하고 능을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조정에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집권 세력의 심기를 거스른 대가가 혹독했다. 여하튼 남효온을 비롯해 원호·이맹전·김시습·조려·성담수는 사육신과는 별도로 역사에서 생육신으로 불리고 있다.
「육신전」은 당시 상황에서는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육신들의 행적을 야인(野人)의 입장에서 기록했다. 정사(正史)에서 배척됨으로써 자칫 매몰될지도 모르는 그들의 행적을 남효온이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육신전에 기록된 내용의 일부만 간략하게 보면 다음과 같다.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등과한 뒤 충청도관찰사·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인 박팽년은 단종이 세조에 의해 폐위되자 “이런 법은 없다”라며, 경회루 못에 빠져죽으려 했다. 그러자 성삼문이 “후일을 도모하자”며 말린 일을 기록하였다. 성삼문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옥새를 안고 통곡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무인이었던 유응부는 단종복위 계획이 발각된 뒤에 세조가 무사를 시켜 그의 살가죽을 벗겼으나 굴하지 않았다.
사육신의 행적을 모두 서술한 뒤 남효온은 찬을 통하여, “누가 신하가 못 되리요마는, 지극하도다, 여섯 분의 신하여! 누가 죽지 않겠냐마는, 크도다, 여섯 분의 죽음이여!”라며, 신하로서의 의리를 지킨 육신들의 절개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 이제 김문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그는 충북 옥천 출신으로 예문관검열·병조참의·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455년 공조판서에 임명됐으며, 이듬해인 1456년 성삼문·박팽년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돼 모두 주살당할 때, 김문기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1691년(숙종 17) 조정에서는 육신을 공인해 복관시켰고, 1731년(영조 7)에는 김문기를 복관하고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김문기는 삼중신(三重臣: 민신·조극관·김문기)의 한 사람으로 선정됐다.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해 『세조실록』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 문적을 널리 고증해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 때 김문기에게는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를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김문기도 사육신에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이에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결의에 따라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假墓)가 설치됐다. 그러니까 ‘사육신+김문기’가 된 것이다. 이미 사육신이 있어 다른 사람을 빼고 김문기를 넣을 수는 없지만 사육신의 개념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당시 학자들 사이에 찬반양론이 벌어져 언론까지 보도를 할 정도였다. 여하튼 사육신 묘역에는 현재 사육신을 비롯해 백촌 김문기까지 일곱 명의 충신을 모시고 있다. 묘역 앞에 있는 사당 의절사에서는 이들 7명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10월 9일에 추모제향을 올린다.
본관이 김녕(金寧)인 김문기의 가계를 보면 대단한 명문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김광저이고, 할아버지는 호조판서를 지낸 김순이다. 아버지는 호분시위사 좌령 사직을 지낸 김관이고, 어머니는 옥천 육씨이다. 부인은 이조판서를 지낸 김효정의 딸 정경부인 선산 김씨이다.
현재 김문기의 유고를 엮은 6권 3책의 『백촌 선생 실기(白村先生實記)가 전하고 있다. 경북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 등에서 그를 향사하고 있으며,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 금회영각에는 그의 영정이 배향돼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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