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문신인 김일손(1464~1498)과 박승임(1517~1586) 등은 소고(嘯皐) 권오복(權五福·1467~1498)의 문재가 뛰어나 그의 문장은 영원히 전해져야 한다고 칭송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권오복이 김일손 등과 처형됐다. 이 사화는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으로, 조선시대 4대 사화 가운데 첫 번째이다.
권오복은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런데도 김일손과 경주부윤과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박승임 등이 권오복의 문체가 특히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그런 권오복이 왜 처형을 당했던 것일까? 이번 글에서는 권오복이 이처럼 뛰어난 문신이었는데, 처형된 이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간략히 알아보자. 본관이 경북 예천인 권오복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자는 향지(嚮之), 호는 수헌(睡軒)이다. 할아버지는 권유손, 아버지는 권선,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계전의 딸이다. 그는 다섯 형제 가운데 셋째였다. 1483년(성종 14)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한 이문좌(李文佐·1461~1491)의 처남이다.
권오복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였다. 같은 문하인 김일손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20세인 1486년(성종 17) 사마시와 식년문과의 병과에 동시에 급제해 예문관에 들어갔다. 그는 예문관을 거쳐 요직인 홍문관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로 학문에 전념했다. 그런 다음 홍문관 교리가 되었지만, 새로운 임금 연산군의 자질에 회의를 가져 조정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1496년(연산군 2) 노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구실로 향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2년 뒤인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권오복은 향리에서 잡혀 올라왔다. 그리하여 김일손·권경유 등과 함께 처형됐다. 그가 처형된 이유는 이러했다.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한 사관(史官) 김일손과 가까웠다는 때문이었다. 또한 사림파의 대표였던 김종직 문하였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법이라는 잣대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耳懸鈴 鼻懸鈴·이현령 비현령)였다. 전도유망한 권오복이 처형됐을 때 나이가 고작 32세였다. 이전의 글들에서 몇 차례 언급했듯이 무오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권력다툼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이었다.
권오복은 문장이 맑고 강하다는 평을 들으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하지만 처형을 받은 문사들에게 공통적인 일이지만, 그의 시문은 사화 이후 불태워 버리거나 산실되어 온전하게 남아 있지 못하였다. 다행히 권오복의 형 권오기가 남은 시문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 몰래 집에 보관했다. 권오기는 1495년(연산군 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동생 권오복과 함께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동생이 극형을 당하자 이에 연루되어 전남 해남으로 귀양갔다.
권오기가 엮어 놓은 그 초고가 있어 종손인 권문해가 1584년(선조 17) 대구부사 시절 권오복의 문집 『수헌선생집』을 간행했다. 권오복은 성종으로부터 뛰어난 학문과 문장을 인정받아 여러 문화 사업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1493년 이창신 등과 함께 법률 조문에 밝은 신하로 뽑혀 사율원(司律院)에서 율문(律文) 조정과 율관(律官) 교육을 담당했고, 다음 해에는 역시 이창신 등과 함께 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안기집(安驥集)』·『수우경(水牛經)』 등의 책을 번역하라는 명을 받은 것 등이다.
권오복의 문집에 실린 「무오사화사적(戊午史禍事蹟)」의 내용을 보면 섬뜩하다. “뜻밖에 간신 김종직이 화심(禍心)을 품고 은밀히 당류(黨類)를 결합하여 흉악한 꾀를 부리려고 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항적(項籍)이 의제(義帝)를 시해한 일에 가탁하여 글로 드러내서 선왕(先王)을 헐뜯었다. 하늘에까지 닿을 죄악을 용서할 수 없으니, 대역으로 논죄하여 그를 부관참시 하라. 그리고 그의 문도인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등은 서로 간악한 붕당을 지어 같은 뜻으로 서로 도왔다. 종직의 글을 충성스런 울분에서 나온 것이라 칭찬하여 이를 사초에 써서 먼 후세에까지 전하려고 하였다. 그 죄는 종직과 같은 등급이니 모두 능지처사하도록 하라.”라고 기록돼 있다.
권오복은 당대 여러 신진 사류(士類)의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김일손과 서로의 마음을 토로하며 수창한 시가 많은데, 마치 백아와 종자기 같은 관계를 짐작케 한다. 권오복이 고향에 있을 때 김일손이 마침 경북 상주에 왔다. 둘은 만나서 함께 낙동강 관수루(觀水樓)에 올라 시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그의 시가 없어진 것을 제외하더라도 많이 남아있다. 그중 권오복의 시 「寄閔掌令(기민장령·민 장령에게 주다)」 중 앞부분만 잠시 보자. “羅希奭(나희석)·吉溫(길온)같은 관리, 근거 없이 형벌 시행했으니(羅鉗吉網織無根)/ 많은 혹독한 형리들을 어찌 거론할 수 있겠는가?(酷吏紛紛何足論)/ … ….”
그가 지방 관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띠고 관동 지역에 갔을 때에 지은 작품이다. 당시 권오복이 생각하기에 지방 관리들의 탐욕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요직에 있는 인물들의 올바르지 못한 법 시행이었다. 나희석은 당나라 항주 전당(錢塘) 사람으로, 혹리(酷吏)로 악명을 떨쳐 길온(吉溫)과 함께 당시 ‘나겸길망(羅鉗吉網)’으로 불렸다.
권오복은 중앙에서 근거 없이 법을 시행하기 때문에 지방의 탐욕 관리들을 정당한 법에 근거하여 제대로 다스릴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위 시에서 자신은 올바른 판결을 하는 데에 힘쓰리라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 권오복의 시문은 1478년(성종 9) 성종의 명으로 서거정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우리나라 역대 시문선집인 『동문선』과 『대동시림(大東詩林)』 등에 많이 실려 있다. 이처럼 김일손과 박승임 등의 말대로, 그의 문장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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