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덟 개 도(道) 중에 유배객이 가장 많았던 지역은 전라도였다.
양순필 전 제주대학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유배인은 전체 700명이었다, 그중 전라도 지역이 126명으로 전국 8도 가운데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로 경북이 77명으로 많았고, 평안남도가 20명으로 가장 적었다.
전라도 지역을 다시 세분해 보면 진도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흑산도·고금도·강진·장흥·지도 등의 순이다. 진도에 유배된 사람의 수를 정확하게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배인들은 6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의 반 수 가까이는 3년 미만의 적거생활을 하였고, 10여 명은 4~10년간, 그리고 가장 오랜 유배기간은 19년을 지낸 것으로 나타났다.
진도지역에서의 유배지로는 금갑도(金甲島)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고, 이외 금호도(金湖島), 임회면 피동, 의신면 칠전리 등도 이용되었다.
그러면 진도 유배인 중 가장 오래 그곳에서 유배를 산 사람은 누구일까? 19년간 진도에서 적거하면서 교육과 저술에 힘쓴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80)이다.
노수신은 진도 유배 중에 「서연강의수정(書筵講義修正)」, 「숙흥야매잠주해(夙興夜寐箴註解)」,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번 호에서는 노수신이 어떤 인물이며, 왜 진도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유배를 살았는지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알다시피 노수신은 조선전기 우의정과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의 본관은 광주(光州)로,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노홍(盧鴻)이다. 17세 때인 1531년 성리학자로 명망 높은 이연경의 딸과 혼인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노수신은 27세 때인 1541년(중종 36) 당대 큰 학자였던 회재 이언적에게 배우고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29세 때인 1543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이후 전적·수찬 등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거쳤다.
1544년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서 이기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러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되어 전남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돼 진도로 이배되었고, 진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1565년(명종 20)에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로 다시 옮겨졌다가, 1567년 선조 즉위 후에야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러니까 노수신은 20여 년간 유배생활을 한 것이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서 교리에 기용되어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선조 21)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는 진도에 유배된 기간에 이황·김인후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교하고 명확하여 사림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또한 『대학장구』와 『동몽수지』 등을 주석하였다.
노수신은 홍문관에 있으면서 경연에서 『서경』을 강할 때는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의 설과 일치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진도로 유배되어 당시 들어온 나흠순의 『곤지기(困知記)』를 보고난 후에는 자신의 설을 변경해 도심(道心)은 미발(未發), 인심(人心)은 이발(已發)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그의 저술은 주해서로 「숙흥야매잠」, 『대학장구』, 『동몽수지』 등이 있고, 저서로는 『소재집(蘇齋集)』 13권 8책이 있다. 노수신은 진도에 있는 19년 동안 진도의 풍속에 예속을 심어 ‘진도개화지조(珍島開化之祖)’로 불린다. 진도에 들어온 지 5년 만에 지산면 안치에 초옥삼간을 지어 ‘소재(蘇齋)’라 이름 짓고 정좌하여 경사를 연구하였다. 또한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을 비롯한 1,023수에 이르는 시를 지었다.
노수신은 강력한 개혁 의지를 갖고 국왕 선조에게 건의도 하였으나 국왕은 전혀 개혁할 마음이 없었다. 이 때 사림이 분열하여 서인과 동인이 되어 당쟁을 격화되는 가운데 노수신은 가장 중립적인 입장에서 당쟁을 조정, 화합시키기 위해 진력하였다. 또한 그는 왜적에 대한 군비를 강화를 주장하고 왜국으로의 통신사 파견을 강력하게 반대하기도 하였다.
노수신은 충주의 팔봉서원, 상주의 도남서원·봉산서원, 괴산의 화암서원, 진도의 봉암사 등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는 현재 경북 상주에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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