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중에서 일기를 매일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필자도 어릴 때부터 일기를 거의 매일 쓰고 있지만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매일 매일의 기록을 남긴다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필자는 최근 우리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며 노마드적인 삶을 살고 있는 김현득이란 분이 보내준 책 『엄혜숙의 산책 일기-100일 동안 매일』(이유출판·2021)를 읽고 있다. 그림책 번역과 창작, 강연과 비평 등을 주로 하고 있는 저자가 10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걸으면서 삶을 관찰하고 느낀 생각들을 적은 내용이다. 일종의 일기인 셈이다.
조선 중기에도 약 33년간 일기를 쓴 분이 있다.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란 분인데 41세부터 73세까지 일기를 썼다. 『묵재일기(默齋日記)』이다. 지금도 일기를 쓴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만 조선 중기에 그 오랜 세월동안 일기를 썼다는 사실에 주목을 하여 이번 글의 소재로 삼았다.
묵재는 41세 때인 1535년 11월부터 74세로 사망하기 몇 달 전인 1567년 2월까지 약 33년 동안 일기를 썼다. 하지만 그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20년 넘게 귀양살이를 했던 탓에 일기의 내용 전체가 전해지지는 못하고 현재 17년 8개월분만 남아 있다.
묵재일기는 경기도 양주 노원에서 모친의 시묘살이를 하던 1535년 11월 1일부터 1537년 3월 29일까지는 거우일기(居憂日記), 동부승지에 재직하며 관직 일기 또는 사환 일기를 쓰던 1537년 4월 1일부터 1545년 4월 23일까지는 정원일기, 1545년 9월 경북 성주로 유배를 떠난 뒤의 기록들은 유배일기(流配日記)로 나뉘어진다.
그러면 묵재가 누구인지 잠시 살펴보자.
그의 아버지는 승문원정자 이윤탁(李允濯)이며, 어머니는 신회(申澮)의 딸이다. 그는 일찍이 중형 이충건(李忠楗)과 더불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13년(중종 8) 중형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화를 입자, 문인들이 화를 염려해 조상하는 자가 없었으나 이문건의 형제는 상례(喪禮)를 다했다 한다. 이에 남곤·심정의 미움을 받아, 1521년 안처겸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충건은 청파역에 정배되었다가 사사되고, 이문건은 전남 순천 낙안에 유배되었다.
1527년(중종 23) 사면되어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주서에 발탁되어 여러 벼슬을 거쳤다. 1576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 등에 의해 을사사화가 일어나 족친 이휘(李輝)가 화를 입었다. 묵재는 이에 연루되어 51세 되던 해인 1545년(명종 즉위년)에 큰형 홍건(弘楗)의 아들 휘(煇)가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그 연좌죄로 경상북도 성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23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삶을 마쳤다.
묵재의 일기를 통해 1500년대 당시 양반들의 교유관계, 관직생활, 유배생활 등에 대해 분석해 볼 수 있으며, 당시 한국인들의 식생활·농업·제사 등 각종 생활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 볼 수 있다.
묵재가 쓴 『양아록』에 대해서도 잠시 간략해보자. 『양아록』은 그가 1551년(명종 6)부터 1566년(명종 21)까지 16년간 손자를 양육한 경험을 기록한 일종의 육아일기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육아일기이자 조선시대에 사대부가 쓴 유일한 육아일기이다.
그는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다들 먼저 세상을 떠나고 하나 남은 아들 온(熅)도 어려서 앓은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온이 장가를 들어 내리 딸만 낳다가 1551년 아들 수봉(守封)을 낳았다. 묵재는 58세에 대를 이을 손자를 얻고 매우 기뻐하였으며, 그의 성장 과정을 기록하여 책으로 남겼다.
수봉의 출생 후 16세가 되던 1566년까지, 성장 발달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기 형식의 시로 기록하였다. 시는 모두 37제(題) 41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밖에 산문 4편과 가족과 관련한 기록이 함께 실려 있다.
훈육과 학습을 통하여 기울어진 가문을 일으킬 훌륭한 사대부로 성장하기를 바랐으나, 손자가 성장하면서 공부를 게을리하며 조부의 말을 듣지 않고 언쟁을 벌이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노옹조노탄(老翁躁怒嘆)」을 끝으로 더 이상 기록하지 않았다.
육아는 여성이 전적으로 담당하는 일로 간주되었던 조선시대에 양반 가문의 명망 있는 사대부가 기록한 육아일기라는 점에서 매우 희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내용 중에는 손자가 태어나자 태(胎)를 안치한 일과 손자가 천연두에 걸리자 마마배송굿을 벌인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거의 전해지지 않은 조선시대 양반가의 가정교육과 육아관·아동관은 물론 당시의 굿 등 생활풍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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