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시작 활동을 하고 있는 이기철(65) 시인이 지난 11일 밤 9시 반쯤 필자의 집으로 왔다.
진주에서 시를 쓰고 있다는 시인 두 사람과 함께였다. 한 사람은 최상일 시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한성래 시인이었다. 한성래 시인은 현재 하동경찰서에서 시화전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한성래 시인은 2년 전쯤인가, 악양의 신판곤 삼성엔에코 대표 집에서 차회를 할 때 한 번 본 적이 있다. 이기철 시인이 울산에서 진주로 가 그곳에서 두 시인과 시간을 보내다 악양의 와이너리카페에 들러 놀다가 왔다고 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두 시인은 진주로 돌아가고 이 시인은 필자의 집 2층 방에서 잤다.
아침 일찍 필자와 이 시인은 옥상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아래채인 연빙재로 가 발효차를 마셨다. 이 시인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다. 사교성 또한 아주 뛰어나다. 이 시인은 필자보다 두 살 위다. 필자가 대학원에 다니던 20대 후반(1980년대 후반)에 부산 광복동에 있던 윤산박(윤진상 소설가가 운영)과 양산박(임명수 시인이 운영) 등에서 함께 어울렸다. 당시 이 시인은 목요학술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 필자는 국제신문에 들어가 바빠지는 바람에 서로 만나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 지난해인가 이 시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보고싶다”라고 하면서. 통화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 및 딸과 함께 필자의 집을 방문했다. 그렇게 30여 년 만에 해후를 했다.
그 뒤 두세 번 정도 “악양의 와이너리 카페에 있다”고 연락이 와 만났다. 그는 회원 수가 전국적으로 5천 명이나 되는 SNS를 한다고 했다. 필자는 밴드나 SNS 등을 하지 않아 그런 쪽 활동이나 환경을 알지 못한다. 그는 지인들과 한 번씩 악양의 와이너리카페에 온다고 했다. 이번에 필자의 집에 온 것은 두 번째이다.
아침을 대충 먹고 화개장터 앞의 다우찻집에 가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다 마시자 이 시인이 “장터 안에 들어가 막걸리 한 잔 하자”고 했다. 낮12시 조금 넘어 함께 장터 안의 한 식당에 가 파전에 화개장터막걸리를 마셨다. 그는 “오늘 화개면 사무소 뒤 잔디밭에 열리는 지리산문화예술학교 행사에 가야 하니 같이 가자”고 했다. 지리산문화예술학교가 운영 중인 화첩기행반·문예창작반·풍물반·꽃차반·목공예반 등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성인 학생들과 교사들이 이곳에서 수업을 하고 운동회를 하는 날이라고 했다.
이기철 시인은 풍물반의 서은영 교사를 잘 알고 있었다. 필자는 이 시인과 함께 화첩기행반 천막으로 들어갔다. 필자는 동양화가인 몽피 김경학 선생과 마주 앉았다. 몽피 선생은 화첩기행반의 교사였다. 전남 나주에서 지리산으로 와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몽피”라고 불렀다. 그에게 그림을 배운다는 아이들까지 “몽피”라고 불렀다. 필자는 몽피 선생에게 “몽피가 한자입니까?” 여쭈니, “꿈몽(夢) 자에 피안할 때 피(彼) 자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채에 쓱쓱 그림을 그리더니 이기철 시인에게 주었다. 또 다른 쥘부채에 그림을 그리더니 필자에게 주었다. 필자는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드리며 받았다, “저는 드릴 게 제가 직접 만든 차밖에 없으니 주소를 좀 알려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와이너리카페에 가 인사를 해 안면이 있는 민종욱 꽃차 선생이 발효차를 마시라고 가져왔다. 그는 옆 천막인 꽃차반의 교사였다. 필자가 사는 “목압마을의 효월차에서 차 공부를 하는데 그곳에서 만든 발효차”라고 했다.
좀 있으니 풍물반 학생들이 연주를 했다. 화개장터 앞에서 하프타임 편의점을 운영하는 필자의 친구인 이종한도 함께 북을 치면서 소리를 했다. 그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낭만가객이다. 가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공연도 한다. 여기에 소리까지 배우니 재주가 참 많은 친구다. 풍물반 선생인 서영은 교사도 일전에 이기철 시인을 통해 인사를 한 사람이다. 악양 최참판댁 아래에서 우리옷 가게를 한다고 했다.
이원규 시인도 오랜만에 만났다. 그는 문예창작반 교사였다. 그는 바빠 여기저기 왔다 갔다 했다. 이원규 시인과는 2년 전에 역락출판사의 기획시선으로 각각 시집을 낸 바 있다. 필자는 여기서 낸 시집인 『내가 낸 산길』로 최계락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도 시집으로 어떤 상에 선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 화개골 식당이나 찻집에 가면 그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 많이 붙어 있다.
풍물 연주가 끝나 이종한 친구가 필자가 앉은 자리로 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자네도 들어와 배워 봐라”고 권유했다. 필자는 “나는 재주가 없어”라고 답했다. 운동장에서는 운동회가 한창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필자는 그와 함께 인원만 채워주는 놀이에 두 번이나 참가했다.
이기철 시인은 “오늘이 우리 며느리가 시집온 후 첫 생일이어서 저녁을 함께 먹기로 해 울산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마침 전북 임실에서 이기철 시인의 지인이 와 그를 진주까지 태워주기로 했다. 진주에서는 울산까지 버스가 많다고 했다. 오후 4시 넘어 그는 진주로 출발했다. 필자는 친구 이종한과 더 놀다가 오후 6시쯤 저녁식사 시간이 다 돼서야 자리를 떴다.
이기철 시인은 그동안 몇 권의 시집을 출간했고, 몇 곳의 매체에 서평을 쓰고 있다고 했다. 여하튼 친화력이 타고난 사람이었다. 필자는 수년을 알고 지내는 사람과도 농담 한 번 못하는 스타일인데, 그는 처음 본 사람과도 오핸 세월 친하게 지낸 사람처럼 금방 친숙하게 지냈다. 그런 점이 너무 부러웠다.
이기철 시인과의 만남도 오래되면서 새로움이 있지만, 몽피 선생이나 이원규 시인 등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도 새롭고 즐거웠다. 하지만 외향적이지 못한 필자의 성격 탓에 좀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