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구로도 불리는 이정귀(李廷龜·1564~1635))의 문집인 『월사집(月沙集)』 권21에 보면 「무술변무록(戊戌辨誣錄)」이란 글이 정문(呈文) 4편과 함께 실려 있다. 이정구가 35세 되던 1598년(선조 31)에 지은 총 3,309자로 된 장문이다. 이 내용이 조선 중기 때 중국과의 외교문제에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준다. 이번 글에서는 위 내용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그러면 먼저 이정귀라는 사람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고,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로도 불리는 이 글이 어떻게 작성되었으며, 어떤 내용인지 살펴보겠다.
이정귀는 장유·이식·신흠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로 일컬어진다. 세조 때의 명신인 이석형의 현손이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던 현령 이계의 아들로, 윤근수의 문인이다.
이정귀는 14세 때 승보시에 장원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22세에 진사, 5년 뒤인 선조 23년(1590)에는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에 나아가 설서가 되었는데, 임진왜란 중인 선조 26년(1593)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을 만나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강론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것이 『대학강의(大學講義)』로 간행되었다.
그는 중국어에 능하여 어전통관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을 접대할 때에 조선 조정을 대표하며 중요한 외교적 활약을 했다. 34세 때인 1597년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의 서울인 연경에 다녀왔다. 그런데 이듬해인 1598년에 명나라의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켰다.
이처럼 무고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당황한다. 이에 이항복을 변무사(辨誣使)로 정하고, 승문원 교리로 있던 이정귀를 변무부사(辨誣副使)로 선발하였다. 이때 이정귀가 지은 주소문(奏疏文)이 바로 위 작품이다. 정응태가 조선이 왜적과 제휴하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고 중국 조정에 무고한 사실을 중국황제에게 변명한 글이다.
이정귀는 이 글을 작성해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주장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의 원 이름은 「정주사응태참론본국변무주(丁主事應泰參論本國辨誣奏)」로, 흔히 「무술변무주」 혹은 그냥 「변무주(辨誣奏)」라고도 일컫는다.
글의 내용은 대략 9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단은 서언으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비유하여 조선의 억울한 사정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제2단은 군신의 정리를 떠난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변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억울한 사정을 나타내었다.
제3단은 왜국의 사람들을 꾀어 들인다고 한 내용에 대한 해명이다. 예전부터 왜와 교린우호를 취한 것은 변방을 수호하는 수단이었다. 왜와 함께 중국을 도모하려고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말하였다.
제4단에서는 『해동제국기』에 중국연호를 주로 작게 쓴 것은 신숙주(申叔舟) 개인이 여러 나라의 기문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여기에는 큰 의미가 없음을 밝혔다. 제5단에서는 조선의 역대군왕이 조(祖)라고 한 것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여 그간의 외람됨을 시인하였다.
그 밖의 문물제도를 달리하고 있다고 한 것은 사실과 다름을 설명하였다. 제6단에서는 국방에 힘쓴다는 말에 대해 변명하였다. 제7단에서는 왜를 불러 옛 땅을 회복하려 한다는 말에 대한 해명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중국과 조선이 협력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그런데 지금 왜와 중국을 친다는 것은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제8단에서는 정응태가 무고한 이유를 열거하였다. 제9단에서는 결론을 맺었다.
중국의 각료들이 이 주문(奏文)을 보고 한결같이 “좋은 문장”이라고 하였다. 이 글을 통해 무고에 대한 원만한 해결을 보았던 것이다. 이 글은 선조조의 현안 문제를 해결한 외교적 성과 때문에 화국문장(華國文章)의 정종으로 높이 평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정귀의 글 솜씨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변무주」는 ‘곡진·간측·온자·전중’하다는 평을 받았다. 선조도 이정구의 문장에 대해 “글이 폐부에서 나오기 때문에 곡진하고 간절하다.”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의현(李宜顯‧1669~1745)의 「운양만록(雲陽漫錄)」과 조선 후기의 문신인 심재(沈梓·1624∼1693)의 수필집인 「송천필담(松泉筆談)」 등에서는 이정귀의 이 글이 ‘천하제일의 문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조도 그의 문장을 높게 평가한 바가 있다.
그 뒤 이정귀는 대제학에 올랐다가 1604년 세자 책봉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하였고, 중국 문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100여 장(章)의 『조천기행록 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능력으로 왕의 신임을 받아, 그 뒤 병조판서·예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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