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은 1570년 12월 8일 안동 도산서당에서 70세로 세상을 버리기 직전에 아들에게 마지막 말을 했다.
“저 매화분(梅花盆)에 물을 주어라.”
퇴계의 임종을 지켰던 애제자 이덕홍(李德弘·1541~1596)이 쓴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에는 “선생께서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12월 8일 아침에 ‘분매(盆梅)에게 물을 주라’고 지시하셨다.(初八日 命灌盆梅·초팔일 명관분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계산기선록』은 이덕홍이 스승 이황의 언행 및 문답 등을 수록한 유학서이다.
퇴계는 조선시대의 다른 선비들보다 매화를 남달리 사랑했다. 그리하다보니 매화와 관련된 시를 많이 남겼다. 100여 수에 가까운 매화시 선집인 『매화시첩(梅花詩帖)』을 손수 뽑아 지었다. 또한 도산서당에서 지은 시들만 묶은 『도산잡영(陶山雜詠)』에도 매화시가 여러 수 실려 있다.
그러면 이 매화 화분을 어떻게 퇴계가 소장하고 있었으며, 마지막 유언을 왜 매화분으로 하였을까?
여기에 대한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는 퇴계가 충청도 단양군수로 재직할 때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그는 48세 때인 1458년 단양군수로 부임했다. 퇴계는 이곳에서 18세 관기인 두향(杜香)을 만나 정분을 나누게 된다. 두 사람은 무려 30살이나 되는 나이 차가 있었다. 당시 퇴계는 둘째 부인까지 사망한 홀아비였다. 거문고와 시에 능했던 두향은 당대의 큰 학자였던 퇴계의 인품에 반했고, 퇴계도 비록 나이 어린 관기였지만 지조가 있고 반듯하며 예의범절을 잘 아는 그녀를 가까이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여 많은 러브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의 형 이해(李瀣·1496~1550)가 충청감사로 발령 받으면서 퇴계는 9개월 만에 떠나게 되었다. 당시 상피제(相避制)의 법도에 따라 퇴계는 풍기군수로 옮기게 된다. 상피제는 일정범위 내의 친족 간에는 같은 관청, 통속관계에 있는 관청, 연고가 있는 관직에 근무하지 못하게 했던 제도를 말한다.
그래서 퇴계는 풍기군수로 떠나기 위해 짐을 꾸렸다. 당시의 관료규정 상 임지로 관기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떠나기 전날 밤 퇴계는 가슴이 먹먹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움뿐이구나.” 그러자 두향은 말없이 먹을 갈아 시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어/ 어느 듯 술 다 하고 임마저 가시는 도다/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하나?” 글을 쓰는 두향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려 화선지 위에 뚝뚝 떨어졌다. 눈물이 배인 이 화선지에 퇴계가 답시를 썼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지만(死別己呑聲·사별기탄성)/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구나.(生別常惻測·생별상측측)”
두향은 떠나는 퇴계에게 자신의 분신이라며 매화 화분을 선물했다. 두향은 새로 부임한 군수에게 자신을 관기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군수가 그녀의 부탁을 들어줘 두향은 자유인이 되었다. 이후 그녀는 퇴계와 자주 찾아 정분을 나누었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지은 후 그곳에서 평생 퇴계를 그리며 살았다.
그로부터 21년 후 두향은 퇴계가 세상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한달음에 안동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빈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주보이는 산에서 지내면서 출상을 지켜보았다. 살아서 만나지 못하고 한 사람이 죽어서야 보았다. 얼마나 애절한 재회인가.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남한강에 몸을 던졌다.” “곡기를 끊었다.”는 등의 사후 이야기를 남긴 후 퇴계가 사망한 후 그다지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아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두향은 살아생전 자신이 죽거든 “퇴계선생과 사랑을 이야기 하던 남한강가 강선대 아래에 묻어 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편 지금도 강선대 근처에 있는 두향의 묘에 퇴계 후손들이 벌초하고 관리한다고 한다.
두향의 이야기는 조선시대 명사들의 일화·시화·항담·소화 등을 모은 수필집인 『기문총화(記聞叢話)』와 『단양 향토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퇴계는 이후 도산서당에 지내면서 두향의 매화 화분을 마치 그녀를 대하듯 애지중지했다. 그래서 퇴계가 유언으로 그런 말을 하였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 유언 내용이 “매화분에 물을 주어라”고 한 것은 그것은 죽으면서도 두향을 잊지 못한 때문이었을까? 퇴계는 두향을 가슴에만 묻어두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두향의 매화분은 도산매(陶山梅) 또는 퇴계매(退溪梅)로 불리며, 대(代)를 이어 지금도 도산서원 뜰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고 한다.
한편 퇴계와 두향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곳에 언급돼 있다. 조선 후기 문신인 임방(1640~1724)이 다음과 같이 시를 남겼다. “외로운 무덤 하나 두향인데(一點孤墳是杜香)/ 강 언덕의 강선대 아래에 있네.(降仙臺下楚江頭)/ 어여쁜 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芳魂償得風流價)/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 주었네.(絶勝眞娘葬虎丘)”
대사헌을 지내고, 호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쳐 돈령부판사를 역임한 홍경모(1774~1851)의 ‘배를 타고 구담을 내려가다(舟下龜潭記)’라는 글과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1796~1870)의 문집에 실린 시 ‘두향의 무덤(杜香墓)’, 그리고 19~20세기 한말의 개화 사상가이자 문장가인 김윤식1835~1922)이 ‘장호의 배 안에서(長湖舟中)’라는 시에 붙인 주석 등에도 나온다.
그래서 퇴계는 시 ‘陶山訪梅(도산방매)에서 “산속의 두 옥 같은 신선에게 묻노니(爲問山中兩玉仙·위문산중양옥선)/ 온갖 꽃 피는 봄을 어찌하여 기다렸나?(留春何到百花天·유춘하도백화천)/ 예천 객관에서 서로 만남과는 다른 것 같네,(相逢不似襄陽館·상봉불사양양관)/ 한 번 웃으며 추위 비웃고 내 앞에 오네.(一笑凌寒向我前·일소릉한향아전)”라고 읊었을까?
그는 66세에 공조판서 벼슬을 부여받고 서울로 가는 도중 머물던 예천 관아에 매화가 핀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예천 매화에서는 사랑스러움을 못 느꼈지만, 도산 매화는 퇴계를 보자 방긋 웃었다. 도산 매화는 오로지 퇴계를 보려고 모진 추위도 견디고, 퇴계를 보자 반가워 웃으며 쓰윽 다가오는 듯했다고 묘사한 것일까?
퇴계와 두향의 러브스토리가 허구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실화든 허구든 감히 일반인들이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대학자의 삶에 이런 스토리텔링이 삽입되어 있는 게 얼마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가? 사랑이 없으면 사람살이가 삭막하고 밋밋할 뿐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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