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이 용인으로 호가 도곡(陶谷)인 이의현(李宜顯·1669~1745)은 노론의 대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좌의정 이세백이며, 어머니는 고양군수를 지낸 정창징의 딸이다.
이세백은 소론·남인과의 정치적 대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다. 대사헌·공조판서 등을 두루 거쳤다. 1698년 우의정, 1700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세자부(世子傅)를 겸했으며,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가 세상을 버리자 그 국상을 총괄하였다.
이의현은 요즘으로 치자면 금수저 중에서도 상층 집안 출신이다. 그는 또한 노론의 핵심 가문의 큰 학자인 김창협의 문인이었다. 이의현은 26세인 1694년(숙종 2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부교리 등을 거쳐 1707년 이조정랑에 임명되었고, 이어 동부승지·이조참의·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12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고, 부제학으로 옮겨 그 뒤 대사성을 지냈으며, 황해도관찰사로 2년여 재임한 뒤 도승지·경기도관찰사·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경종이 즉위하자 이의현은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계속 능력을 인정받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늘 순탄하지만은 않다. 잘 나가던 사람도 발목이 걸려 넘어진다. 이의현은 왕세제(王世弟·뒤의 영조)의 대리청정문제로 소론 김일경 등의 공격을 받았다. 이 일로 그는 벼슬에서 물러났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이어 당시 지관(地官)이었던 목호룡(1684~1724)이 1722년 소론에 가담하여 노론 김창집 등이 경종 시해를 역모하였다고 고변했다. 목호룡은 처음에는 노론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왕세제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1722년(경종 2) 소론에 가담하였다. 소론의 과격파였던 김일경의 사주를 받아 노론의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체 4대신을 포함해 일당 60여 명이 경종을 독살하는 역모를 꾸몄다. 거기에 목호룡 자신도 이에 가담하였다고 고변하였다. 이에 노론 정객들이 숙청되는 신임사화(또는 신임옥사)가 일어나는 근거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노론 관료가 화를 입었다.
실제 경종은 수라상에 올라온 게장과 생감을 먹고 복통을 일으키다 5일 만에 사망했다. 목호룡은 경종을 독살한 역모를 고변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사공신(扶社功臣) 3등에 책록돼 동성군에 봉해지고 중추부동지사에 올랐다.
신임사화 또는 신임옥사는 장희빈의 아들로 소론의 뒷받침을 받아 즉위한 경종 즉위 1년 후인 1721년부터 다음 해 1722년까지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후일 영조) 왕세제 책봉문제로 충돌한 사건이다. 결국 노론 계열의 인물들이 대거 축출되었다.
경종은 몸이 허약하고 아들이 없었다. 이에 노론이 경종에게 왕세제 책봉을 주장함에 따라 1721년 왕의 동생인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으며, 더 나아가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의 노론 4대신은 경종의 병을 이유로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주장하였고, 경종이 이를 승인하였다.
이에 소론파의 조태구·유봉휘 등이 부당성을 상소함에 따라 대리청정이 취소되었으며, 이 문제를 노론의 경종에 대한 불충으로 몰아 노론을 탄핵하였던 것이다. 이후 목호룡이 고변사건을 일으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4대신인 이이명·김창집·이건명·조태채 등이 차례로 사형을 당했다.
노론이었던 이의현 역시 이때 죄를 입었다. 그는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 정언 정수기(鄭壽期)가 이의현을 탄핵하여 유배를 간 것이다. 하지만 이의현에게 3년 동안의 유배 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자괴감에 빠지거나 소론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는 대신 벼슬살이에 바빠 멀리했던 학문에의 열정을 다시 불태웠던 것이다.
일과를 짜서 사서삼경 및 『예기』와 『소학』, 주서(朱書), 한문(韓文) 등을 통독하였다. 그는 이러한 자기 극복의 방법으로 귀양살이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고적한 유배지에서의 이의현은 거처에 「소행와(素行窩)」라는 편액을 걸고 유유자적하였다. 그는 유배지에서 한문비평인 「운양만록」(『도곡집(陶谷集)』 권27에 수록) 등을 지었다.
그런 가운데 1724년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이 집권하였고 신임사화가 무고로 일어난 일이라는 노론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이에 이의현도 유배에서 풀려 나와 1725년(영조 1) 형조판서로 다시 기용되었다. 목호룡은 김일경과 함께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급사하였으며, 당고개(唐古介)에서 효시되었다.
이의현은 이어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수어사를 겸하였다. 이듬해는 예조판서로 옮기고 양관대제학이 되어 세자빈객을 겸하다가 1727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이 때 좌의정 홍치중과 함께 소론인 김일경·이진유 등 5인의 죄를 성토하고 처형을 주장하다가, 노론의 지나친 강경책에 염증을 느낀 왕에 의해 정권이 소론에게로 넘어가는 정미환국 때 파직되어 양주로 물러났다.
이듬해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하자 판중추부사로 기용되어 반란 관련자들의 치죄를 담당하였다. 이어 『경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732년 사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35년 특별히 영의정에 임명되어 김창집·이이명의 신원을 요구하는 노론의 주장을 누그러뜨리도록 부탁받았으나, 신원할 수 없다는 반야하교(半夜下敎·밤중에 내리는 교서)에 사직을 청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삭직되었다.
그러나 우의정 김흥경의 구원으로 곧 판중추부사로 서용되어 양주에 머물면서 국가의 자문에 응하였다. 1739년 영중추부사로 승진, 1742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대사성과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노론의 선봉장이었던 민진원이 사망한 뒤 이의현은 노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1740년의 경신처분)과 1741년의 신유대훈으로 신임옥사 때의 시비를 노론 측 주장대로 판정 나게 하였다. 저서로는 『도곡집(陶谷集)』 32권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역사·고전인문학자, 본지 편집위원 massjo@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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